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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사행 단계

준비기

사신이 정해지고 한양을 출발하기까지의 과정은 이압(李土+甲)의 『연행록(燕行錄)』에 자세하다.

삼사(三使)를 결정하다

1777년(정조 1) 7월 11일 벼슬아치들의 성적을 평가하여 승진시키거나 면직을 결정하는 도목정사(都目政事)가 열렸다. 이날 겨울에 출발하는 동지겸사은사의 삼사를 결정하였는데, 이압은 부사에 1순위로 올라 낙점을 받았다.

삼사가 혜민서에서 회동좌를 열어 인사를 나누다

같은 달 26일에는 정사로 뽑힌 하은군 광(垙)과 서장관에 뽑힌 이재학(李在學)과 함께 혜민서(惠民署)에서 회동좌(會同坐)를 열어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사신의 명칭이 정해지다

9월 20일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조정에서 정조의 즉위를 반대했던 홍인한(洪麟漢)과 정후겸(鄭厚謙) 등을 사형에 처한 일을 중국에 알리자는 건의한다. 정조는 이를 재가하여, 동지사 편에 역적을 처벌한 일을 기록한 토역주문(討逆奏文)을 함께 보내기로 결정한다. 이리하여 사신의 명칭은 사은진주겸동지사(謝恩陳奏兼冬至使)로 정해졌다.

호조에 나아가 방물을 포장하다

10월 16일에 호조(戶曹)에 나아가 청나라에 보내는 방물인 세폐를 포장하였다.

의정부에 나가 방물을 봉하여 싸고, 국서를 점검하는 사대를 행하다

10월 24일에는 이른 아침부터 의정부에 나가 방물(方物)을 봉하여 싸는 일에 참여하고, 이어 삼사가 모여 국서를 점검하는 사대(査對)를 행했다. 사대란 황제에게 바치는 표문(表文)과 6부에 바치는 자문(咨文)을 살펴 틀린 글자가 있는지 나중에 외교적인 문제가 될 표현은 없는지 확인하는 일로, 서울에서 떠나기 전에 3번, 도중에 3번을 할 정도로 중요한 작업이었다. 이날 사대에는 의정부의 세 정승과 육조의 판서, 애초에 문서를 만들었던 승문원(承文院)의 제조가 참여하여 꼼꼼하게 살폈다.

조선 국왕이 중국 황제에게 보낸 외교문서인 표문

삼사가 왕에게 하직을 고하는 숙배를 행하다

10월 26일에는 삼사가 대궐에 나가 왕을 하직하는 숙배(肅拜)를 행했다. 희정당(熙政堂)에서 삼사를 맞은 정조는 무사히 다녀오라는 인사와 함께 담피가죽으로 된 귀싸개[耳掩] 2개와 쥐가죽으로 된 귀싸개 1개를 가져오게 하여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겨울철 사행에 반드시 필요한 방한구였다. 3사는 공경히 받아 사모 위에 쓰고 나왔다. 승정원으로 물러나오니 별감이 나라에서 주는 납약(臘藥) 5종과 단목(丹木)ㆍ백반(白礬)ㆍ호초(胡椒)를 전해주었다. 모화관(慕華館)에 이르러 다시 사대를 행했다. 좌의정, 예조 판서, 공조 참판, 병조 참의, 형조 참의 등이 함께 하였다. 가마를 타고 홍제원(弘濟院)에 이르자 호조에서 작별의 연회를 베풀었다. 배웅 나온 친척들과 예전에 근무하던 관청의 하급자들과 일일이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오후 4시에 길을 떠났다.

임금께 사행 떠남을 고하는 곳인 희정당

떠나는 신하들에게 선물을 내렸던 희정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