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회동관
성경에서 북경까지는 1,509리였다. 북경에 도착한 사행은 주로 옥하관(玉河館)이라고 부르는 회동관(會同館)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연행사들은 표문과 자문을 청나라에 제출하는 의식인 표자문정납(表咨文呈納), 정사 이하 모든 정관이 홍려시(鴻臚寺)의 패각(牌閣) 앞에서 3궤 9고두를 연습하는 홍려시연의(鴻臚寺演儀), 사행 정관이 청의 황제를 알현하는 조참(朝參), 방물과 세폐를 바치는 방물세폐정납(方物歲幣呈納), 숙소인 회동관에서 열리는 하마연(下馬宴), 청나라가 조선의 왕과 삼사신 및 원역에게 주는 회송예물(回送禮物)을 받는 영상(領賞), 떠나는 사신 일행을 위해 마련하는 상마연(上馬宴) 등 각종의 의식을 거행하였다.
그 동안 회동관 뜰에서는 이른바 회동관 개시(會同館開市)가 실현되었다. 회동관 개시는 상마연이 끝난 뒤, 청나라 예부에서 관원이 상품의 불공정 거래자와 잠매자 및 거래 금지품목의 매매자에 대한 처벌 규정을 회동관의 벽에 고시(告示)한 뒤 시작되었다. 고시 후 북경의 각 점포 상인들이 화물을 싣고 회동관에 들어오면 예부가 파견한 감시관의 감독 아래 조선 역관 및 상인과의 무역이 이루어졌다. 귀국 길에 오를 때는 반드시 사신 일행이 무역한 물품의 포수(包數)를 기록하여 청나라 아문(衙門)에 제출하고 아문에서는 그 수를 점검한 뒤 북경을 떠나게 하며, 그것을 예부에 보고하여 산해관과 봉황성에 통보함으로써 사행의 귀환 길에 이루어지는 무역을 통제하고 있었다.
숙소겸 무역장소였던 회동관터
회동관터에 세워진 수도빈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