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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사행단 구성

복식

신분ㆍ지위ㆍ계절ㆍ노정에 따라 달라진 사행 복식 : 노정에서는 ‘편복’ , 북경 입경 후 의식과 공식 행사 시에는 ‘공복’

정사의 평복에 대한 내용

정사의 평복 이미지 정사의 평복

사행을 떠나는 일 전체가 공적인 일이긴 하지만, 풍찬노숙의 연행 노정에서는 대개 편복(便服)을 입었다. 편복이란 평상시에 간편하게 입는 옷, 곧 사복(私服)이므로 일률적으로 그 구성을 알 수가 없다. 다만 도포에 술띠를 띠고, 큰 갓을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부사의 공복에 대한 내용

부사의 공복 이미지 부사의 공복 사모 단령 목화 흉배 대

중국에 들어가는 사행원 일행의 복식은 곧 공식 행사에 착용하는 기본 정복, 즉 공복(公服) 차림이었다. 하지만 공복을 입고는 험난한 사행 노정을 감당할 수 없어 편복을 입고 가다가 북경에 들어가면서 공복으로 바꿔 입었다.
북경의 도성으로 들어가기 전에 동악묘(東岳廟)에 들러 삼사는 공복을 갖추어 입는다. 정사의 가마 앞에서 길을 열던 전배(前輩)들을 뒤로 돌리고, 편하게 타고 가던 쌍교와 해를 가리던 일산도 치운다. 남문으로 들어가 숙소에 이르면 관소에서 사신 접대를 책임지는 제독(提督) 이하 대사(大使)ㆍ대통관(大通官)ㆍ차통관(次通官) 등이 일제히 모여 사행을 맞이하였다.
표문과 자문을 바치는 날에는 정사 이하 모두가 공복을 갖추어 입고 표문과 자문을 받들고 예부로 나아갔다. 명나라 때에는 정사는 상서(尙書)에게 자문을 바치고, 역관들로 하여금 표문을 의제사(儀制司)에 바치게 하였다.
청나라에 오면 삼사가 역시 공복을 갖춘 예부의 상서와 낭중들이 남쪽으로 향해 서면, 삼사가 들어와 무릎을 꿇고 자문(咨文)과 표문(表文)을 한꺼번에 바쳤다. 이어 홍려시(鴻?寺)에서 조회(朝會) 의식을 연습하는 날, 조회에 참여하는 날, 떠난다고 하는 인사하는 날 같이 공식적으로 공복 착용을 요구하는 행사 외에도 황제와 함께 참여하는 행사에는 늘 공복을 입어야만 했다.
사모(紗帽)는 고려 말부터 조선말까지 문무백관이 상복에 착용하던 관모로서 조선 후기에는 공복ㆍ예복 등에 두루 사용되었다. 뒤가 높고 앞이 낮은 2단 모정부(帽頂部) 뒤에 각이 2개 붙어 있는데 연각(軟角)과 경각(硬角)으로 구분된다. 모정부와 각은 죽사와 말총으로 짜고 사포로 씌우는데 사모라는 명칭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형태는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데 초기에는 모체가 낮고 검은 댕기를 드리운 것과 같은 연각이었다. 이것이 조선 명종 때를 전후하여 양 옆으로 뻗은 경각으로 변하였으며 중기 이후로는 모체가 높아지고 양각도 평직으로 넓어졌다가 말기에는 모체가 낮아지면서 양각의 길이도 짧아지고 굽어졌다.
단령(團領)은 위아래가 붙은 겉옷[袍]으로 깃이 곧은 직령에 비해 깃이 둥글다. 소매가 넓고 길이는 발꿈치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다. 겨울에는 주로 명주, 여름에는 마포로 만들며, 당상관은 사라능단(紗羅綾緞: 얇은 사와 두꺼운 비단)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목화(木靴)는 조선시대 왕과 문무 관리들이 관복을 입을 때 신던 목이 긴 마른 신이다. 검은 녹피(鹿皮)나 아청공단 또는 융으로 만들고 안은 백공단으로 하며 가장자리에는 홍색 선을 둘렀다. 당상관(堂上官)은 목 부분에 흰색 천을 댔으며, 발목 앞쪽에 흰 선을 한 줄 두르기도 하였다.
흉배(胸背)는 관복의 가슴과 등에 덧대는 수 놓인 천을 말한다. 조선 초기에 보급되었으나 화려하다는 이유로 반대가 많아 단종 때가 되어야 시행되었다. 대군(大君)은 기린(麒麟), 도통사(都統使)는 사자, 제군(諸君: 왕자 또는 공신 가운데 ‘군’을 얻은 사람들)은 백택(白澤: 중국에서 덕망이 있는 임금이 다스리는 시대에 나타난다고 하는 상상의 신령스러운 짐승. 사자의 모양을 하고 여덟 개의 눈을 가졌으며, 말을 한다고 한다), 문신 1품은 공작(孔雀), 2품은 운학(雲鶴), 3품은 백한(白: 꿩과 비슷한 새)을 수놓고, 무신 1 ㆍ2품은 호표(虎豹), 3품은 웅표(熊豹), 대사헌(大司憲)은 해태(獬豸: 시비와 선악을 판단하여 안다고 하는 상상의 동물. 사자와 비슷하나 머리에 뿔이 있다고 한다)로 정하여 3품 당상관 이상만 해태 흉배를 붙이도록 하였다.
대(帶)는 관리가 관복에 갖추어 띠는 띠로 ‘품대(品帶)’라 이르기도 한다. 품계에 따라 장식에 구별이 있었다. 1품 서대(犀帶), 정2품 삽금대(鈒金帶), 종2품 소금대(素金帶), 정3품 삽은대(鈒銀帶), 종3품, 4품 소은대(素銀帶), 5~9품 흑각대(黑角帶)를 사용하였다. 서대는 무소뿔로 장식한 혁대이고, 삽금대는 보상화문을 새긴 금색의 띠돈을 장식한 대를 말하는 것으로 상당히 화려하다. 삽은대는 보상화문을 새긴 은색의 띠돈을 장식한 대이고, 소금대는 무늬를 조각하지 않은 금으로 장식한 혁대이며, 소은대는 조각이 없는 은장식을 붙인 띠이며, 흑각대는 검은색의 무소뿔로 장식하여 만든 띠이다.
자제군관의 복식에 대한 내용

자제군관의 복식 이미지 자제군관의 복식 갓 술띠 창의 태사혜

평소에는 갓을 썼으나, 추울 때는 머리에 개가죽으로 만든 이엄(耳掩)을 썼다. 이엄은 말 그대로 귀[耳]를 감싸는[掩] 도구로, 귀를 따뜻하게 한다[暖]고 하여 난이(暖耳)라고도 하고, 흔히 남바위로 불리는 물건이다. 추위를 막기 위하여 머리에 쓰는 쓰개인데, 겉의 아래 가장자리에 털가죽을 둘러 붙였고 앞은 이마를 덮고 뒤는 목과 등을 덮는다. 얼굴로 오는 한기를 막기 위해 쥐털로 만든 목도리와 뺨가리개를 번갈아 썼다.
평소에는 갓을 썼으나, 추울 때는 머리에 개가죽으로 만든 이엄(耳掩)을 썼다. 이엄은 말 그대로 귀[耳]를 감싸는[掩] 도구로, 귀를 따뜻하게 한다[暖]고 하여 난이(暖耳)라고도 하고, 흔히 남바위로 불리는 물건이다. 추위를 막기 위하여 머리에 쓰는 쓰개인데, 겉의 아래 가장자리에 털가죽을 둘러 붙였고 앞은 이마를 덮고 뒤는 목과 등을 덮는다. 얼굴로 오는 한기를 막기 위해 쥐털로 만든 목도리와 뺨가리개를 번갈아 썼다.
김창업이 띤 띠는 세조대(細條帶: 술띠)라는 술이 달린 띠였을 것이다. 띠는 실을 몇 겹 감은 것으로, 폭이 넓은 것은 광다회(廣多繪), 가늘고 둥근 것은 동다회[圓多繪]라고 했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를 살펴보면 모든 양반들의 가슴에는 반드시 술띠가 둘러져 있다. 중인들도 가슴에 술띠를 둘렀지만, 대개 검은색이었다. 특히 자신들보다 높은 신분 앞에서는 검은색을 띠어야했다. 김창업은 고위층이 띠는 붉은색과 중인들의 검은색, 그 중간의 색을 취해 자신을 위치시킨 것이다.
도강 후에 흰색 도포를 벗고 면으로 된 회색 창의로 갈아입었다. 창의는 벼슬아치가 평소에 입던 옷으로 뒷솔기가 갈라져 있는 옷이다. 여기에 황갈색[沈香色] 띠를 매었고, 칼과 주머니를 안장에 걸었다. 김창업이 입었다는 철릭은 중인들이 입는 철릭이 아니라 다만 도포를 창의로 바꿔 입은 것을 말한 것처럼 보인다. 철릭은 뒷솔기가 터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철릭은 소매가 넓어 도포와 비슷한데, 양 옆이 트여 있지 않고, 허리 아래로 주름이 잡혀 있다. 원래 윗옷과 치마를 따로 재단해 허리에서 치마주름을 잡아 연결시킨 외투로 군복의 일종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윗옷과 치마의 비율이 거의 같았는데 후기로 갈수록 치마가 두 배 이상 되었다. 소매도 크게 넓어져 결과적으로 도포와 비슷해졌다. 군복이기는 하더라도 관아의 아전, 양반관료에 딸린 겸인(傔人)들도 많이 입었다.
발에는 짐승의 털가죽으로 크게 만든 버선[氈襪]과 짚신을 신었다. 보통은 천과 천 사이에 솜을 누벼 넣은 솜버선을 신었다. 털가죽 버선을 신어 발이 커졌기 때문에 평소 신던 흑혜(黑鞋)나 태사혜(太史鞋) 같은 가죽신을 신을 수 없었다. 또한 가죽신은 바닥이 얇고 미끄럽기 때문에 눈 덮인 고개를 오르기에는 마찰력이 높은 짚신이 제격이었다. 짚신 가운데 동구니신은 짚을 엮어 장화 모양으로 만든 신이다.
상방비장의 복식에 대한 내용

상방비장의 복식 이미지 상방비장의 복식 전립 철릭 배자 태사혜 신율

『일하제금합집(日下題襟合集)』에 나타난 상방비장의 복식
철릭 위에 배자를 입고, 공작술을 붙인 전립, 신울(신발의 양쪽 가에 댄, 발등까지 올라오는 울타리)에 아름다운 문양이 있는 태사혜(太史鞋) 차림이었다.
조선시대 무관이 착용하던 벙거지로 짐승의 털을 다져 만든 담(?)으로 모옥을 만들고 여기에 양태(凉太)를 달아 만드는데 형태는 패랭이와 비슷하다. 모옥에는 공작 깃털ㆍ삭모ㆍ정자를 꽂아 품등을 구분하였다.
철릭은 소매가 넓어 도포와 비슷한데, 양옆이 트여 있지 않고, 허리 아래로 주름이 잡혀 있다. 원래 윗옷과 치마를 따로 재단해 허리에서 치마주름을 잡아 연결시킨 외투로 군복의 일종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윗옷과 치마의 비율이 거의 같았는데 후기로 갈수록 치마가 두 배 이상 되었다. 소매도 크게 넓어져 결과적으로 도포와 비슷해졌다. 군복이기는 하더라도 관아의 아전, 양반관료에 딸린 겸인(傔人)들도 많이 입었다.
배자(背子, 褙子)는 저고리 위에 덧입는 조끼 모양의 옷소매와 섶, 고름이 없으며 깃은 좌우모양이 같고 맞닿는다. 여밈은 앞길 양겨드랑이 밑에 긴 끈을 달아 앞에서 매어 여미도록 되어있다. 길고 짧음에 따라 장배자와 단배자로 나뉘어진다.
조선시대 양반들이 편복에 신던 고급 신은 겉을 비단으로 싸서 만들었으며, 마른 땅에서만 신기 때문에 ‘마른신’이라고 한다. 마른신은 가죽으로 신창을 만들고 비단으로 신울을 싼 운두가 낮은 신으로, 남자들의 신은 태사혜라 하였다.
신발의 양쪽 가에 댄, 발등까지 올라오는 울타리
마두의 복식에 대한 내용

마두의 복식 이미지 마두의 복식 전립 철릭 짚신

마두는 소매가 좁은 두루마기를 입었다. 두루마기[周衣]는 조선시대 남녀가 착용하던 옷의 하나이다. 깃이 곧다. 양쪽 겨드랑이가 터져서 3쪽이 되는 소창의와 달리 사방이 두루 막혀 있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두루마기는 상류층의 방한용으로 혹은 겉옷의 받침옷으로 착용되었고, 도포나 소매 넓은 포를 착용하지 못하는 상민계급에서는 겉옷으로 착용하였다. 머리에는 전립(氈笠)을 썼다.
신발은 짚으로 삼은 짚신[草鞋]이나 마로 삼은 미투리[麻鞋]였다. 미투리는 형편이 좀 나은 사람이 신었으니, 식구들에게 노자까지 다 털어주고 온 사람들은 짚신도 감지덕지였다. 비가 오거나 걸어 강을 건널 때면 맨발이 되었고, 눈이 많이 내리면 짚이나 헝겊으로 발과 신발을 한꺼번에 묶어 미끄러지거나 눈 속에 신발을 빠뜨리는 일을 방지했다.
마두와 하인들이 쓰는 전립(氈笠)은 벙거지일 것이다. 의주의 군뢰들이 쓴 전립처럼 화살이 뚫지 못할 정도로 단단하지도 않고 화려한 장식이 있지도 않은 형태만 비슷한 보잘것없는 모자였을 것이다. 『흥부전』의 이본인 『장흥보전』을 보면 흥부 부부가 큰 박을 타니 그 속에서 수많은 종들이 나왔는데, 남자 종들이 모두 ‘즌입[氈笠]’을 쓰고 있다고 하고 있다.
철릭은 소매가 넓어 도포와 비슷한데, 양옆이 트여 있지 않고, 허리 아래로 주름이 잡혀 있다. 원래 윗옷과 치마를 따로 재단해 허리에서 치마주름을 잡아 연결시킨 외투로 군복의 일종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윗옷과 치마의 비율이 거의 같았는데 후기로 갈수록 치마가 두 배 이상 되었다. 소매도 크게 넓어져 결과적으로 도포와 비슷해졌다. 군복이기는 하더라도 관아의 아전, 양반관료에 딸린 겸인(傔人)들도 많이 입었다.
신발은 짚으로 삼은 짚신[草鞋]이나 마로 삼은 미투리[麻鞋]였다. 미투리는 형편이 좀 나은 사람이 신었으니, 식구들에게 노자까지 다 털어주고 온 사람들은 짚신도 감지덕지였다. 비가 오거나 걸어 강을 건널 때면 맨발이 되었고, 눈이 많이 내리면 짚이나 헝겊으로 발과 신발을 한꺼번에 묶어 미끄러지거나 눈 속에 신발을 빠뜨리는 일을 방지했다.
하인의 복식에 대한 내용

하인의 복식 이미지 하인의 복식 전립 저고리 바지 짚신

하인들은 마두보다 짧은 옷을 입었다. 두루마기나 철릭 같이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외투를 입지 않은 저고리 차림이었다. 머리에는 장식이 없는 전립을 썼고, 바지에 대님을 치고, 짚신을 신었다.
하인들이 쓰는 전립(氈笠)은 벙거지일 것이다. 의주의 군뢰들이 쓴 전립처럼 화살이 뚫지 못할 정도로 단단하지도 않고 화려한 장식이 있지도 않은 형태만 비슷한 보잘것없는 모자였을 것이다.
저고리는 아무리 길어도 무릎을 내려오지 않는다.
바지로 보면 잠방이일 수도 있다. 조선시대 바지는 통이 넓은 바지와 좁은 바지로 나뉘는데, 통이 넓은 바지는 활동하기 편하도록 발목 부위에 대님을 쳤다.
하인들은 신발은 짚으로 삼은 짚신[草鞋]이나 마로 삼은 미투리[麻鞋]였다. 미투리는 형편이 좀 나은 사람이 신었으니, 식구들에게 노자까지 다 털어주고 온 사람들은 짚신도 감지덕지였다. 비가 오거나 걸어 강을 건널 때면 맨발이 되었고, 눈이 많이 내리면 짚이나 헝겊으로 발과 신발을 한꺼번에 묶어 미끄러지거나 눈 속에 신발을 빠뜨리는 일을 방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