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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사행단 구성

이동수단

계절ㆍ개인의 성향ㆍ사행단의 재정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이동수단

사행의 이동수단은 시대에 따라 다르고, 계절ㆍ개인의 성향ㆍ사행단의 재정 상태에 따라 또 달라진다. 대개 정사와 부사는 쌍교(雙轎)를 탔다. 가교(駕轎) 또는 쌍마교(雙馬轎)라고도 불린 쌍교는 대감(大監)이라 부르는 2품 이상과 승지(承旨)를 지낸 사람에게만 타는 것이 허용되었으며, 왕과 그 가족을 제외하고는 도성 밖에서만 타게 하는 최고의 가마였다. 쌍교는 가마를 사람이 메지 않고 말 두 마리가 앞뒤로 끌었다. 앞뒤로 길게 뻗은 끌채를 앞뒤 말의 안장 좌우에 걸고, 좌우로 짧게 뻗은 끌채를 양쪽에서 가마꾼들이 잡아 균형을 잡았다. 그러므로 정사와 부사에게는 따로 4명의 가마꾼[駕轎扶囑]이 공식 수행원으로 인정되었다.

<연행도>,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 소장 가마, 말, 도보로 북경성 앞에 이르렀던 사행단의 모습

품계가 낮으면 탈 수 없는 쌍교

정사나 부사보다 품계가 떨어지는 서장관은 쌍교를 탈 수 없었다. 서유문(徐有聞)은 좌거(坐車)를 탔다. 좌거는 말이 끄는 수레인데, 수레 위에 가마처럼 벽과 지붕을 얹어 비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 수레 몸체의 길이는 다소 길었고, 뒤에 두 바퀴를 달았으며, 앞으로 긴 채를 만들어 말의 안장에 연결하였다. 따로 균형을 잡아주는 가마꾼들이 필요 없어 인건비가 덜 들었지만, 안정성이 떨어졌다. 길이 평탄하면 별 문제가 없었지만, 비탈길이나 돌무더기 위를 지나게 되면 바퀴에서 벼락같은 소리가 나면서 상하좌우로 흔들려 지붕에 머리를 부딪치기도 하고 좌우 벽에 뺨을 스쳐 생채기를 입기도 하였다.

경비 절감을 위해 가마를 버리고 노새를 타기도 했다

명ㆍ청교체기에 해로로 중국에 갔던 홍익한(洪翼漢)은 경비 절감을 위해 가마를 버리고 노새를 탔다. 명나라와 청나라의 틈바구니에서 호란을 겪던 조선은 돈이 부족했고, 북방에서 청나라와 밀고 밀리는 전쟁을 벌이던 명나라는 조선 사행을 지원해 줄 경제적ㆍ행정적 여유가 없었다. 역관들이 중국에서는 낮은 벼슬아치[小官]들도 반드시 뚜껑이 있는 가마[屋轎]를 탄다며 말렸다. 사행의 위신을 고려한 측면도 있지만, 서장관이 노새를 타는 마당에 자신들이 그보다 더 좋은 이동수단을 탈 수 없어 말린 측면도 있다. 하지만 홍익한은 아직 근력이 세고 말 타는 것에 익숙하다며, 좋은 노새를 구해 타고 갔다. 하지만 음력 9월은 찬바람이 부는 시기였다. 20일을 버티던 홍익한도 오한이 심해지자 은자 6냥을 주고 가마로 갈아탔다.

심양과 북경성에서는 가마에서 내려야 했다

옛날 청나라 황궁이 있던 심양과 현재 황제가 있는 북경성에서는 쌍교나 좌거를 탈 수 없었다. 성 밖에서 편복에서 공복(公服)으로 갈아입고 말을 타고 움직였다. 누런 기[黃旗]를 꽂은 자문(咨文)을 실은 수레가 앞장서고, 말에 탄 3사가 그 뒤를 이었다.

「항해조천도」,<등주부를 지나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덕형 사행의 모습

말을 탔던 역관과 군관

역관과 군관은 대개 말을 탔다. 당상통관과 상통사, 의관ㆍ화원ㆍ군관에게는 역마(驛馬) 1마리와 마부 1명이 원칙적으로 배정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유가 있는 사람은 말은 짐을 싣는 것으로 쓰고 태평거(太平車)라는 수레를 빌어 탔다. 수레 위에 나무를 얽어 둥근 집을 만드는데, 앞부분의 3분의 1은 비워두고 발과 휘장을 쳐놓고 사람이 드나들게 하였다. 집 안쪽은 남색 베를 발랐고, 양쪽 옆으로 한 변이 30cm 정도의 유리창을 달아 밖을 구경할 수 있게 하였다. 서로 등을 맞대면 두 사람까지 탈 수 있지만, 대개 혼자 탔다.

물을 건널 때도 몸에 물을 묻히지 않았던 사행단

육로로 가면서 강을 건너는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다리가 있는 강은 약간 돌아가더라도 다리로 건넜다. 수심이 얕고 폭이 넓지 않으면 걸어서 건넜다. 삼사를 비롯한 정관은 몸에 물을 묻히지 않았다. 하인들이 알몸으로 메고 건너는 가마를 타기도 했고, 하인의 목을 타고 건너고, 나무로 뗏목을 엮어 하인들에게 메고 건너게 하고, 그냥 말을 타고 건너기도 하였다. 하인들은 말안장이며, 중요한 짐이 젖지 않도록 하기 위해 머리 위에 짐을 얹어 여러 번 물을 건너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