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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행 단계

귀국길(사조)

동악묘에서 편복으로 갈아입고 가다 북경성의 조양문(朝陽門)을 나선 사행은 입성할 때와 마찬가지로 동악묘에 가서 편복으로 갈아입었다. 외교 현안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사행은 한시라도 빨리 귀국하기를 바라는 부담 없는 길이었지만, 제대로 일을 끝내지 못한 사행은 불안한 마음으로 가는 길이었다.

동행한 상인들이 매매가 덜 끝나면 출발이 지연되었다 1864년(고종1, 동치3)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왔던 장석준(張錫駿)의 경우를 살펴보자. 이듬해 2월 4일 북경을 떠나기로 했던 사행은 동행한 인삼 상인[蔘商]들이 매매가 덜 끝났다고 출발을 미뤄달라고 하자, 닷새를 늦춘 9일에 출발하였다. 하지만 상인들은 여전히 매매를 마치지 못한 상태였다. 더 이상 북경에 머무를 수 없던 사행단은 이들로 하여금 뒤따라오게 하고 우선 길을 떠났다. 겨우내 얼었던 흙이 풀리면서 만들어진 진창길과 물난리를 겪으면서 힘들게 책문에 도착했다. 하지만 인삼 상인들의 화물을 실은 수레는 쉽사리 도착하지 않았다. 사행단은 책문에서 보름을 더 기다려야했다. 3월 5일 장석준은 도강에 앞서 수행원들의 짐을 점검하였고, 그 과정에서 몰래 숨겨놓은 인삼[潛蔘] 490근을 적발하였다. 장석준은 조선과 청나라 상인들을 모아 놓고 불법 인삼을 모두 불태워 사절의 기강을 세웠다. 고국을 코앞에 두고 마냥 기다릴 수 없어, 3월 17일 결국 사람만 먼저 압록강을 건넜다. 짐바리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던 중 22일 상사와 부사를 먼저 출발시켰고, 책문에 사람을 보내어 빨리 올 것을 재촉했다. 4월 7일 오라는 짐바리는 도착하지 않고, 앞서 떠난 상사와 부사, 그리고 아들의 편지와 짐바리를 사검(査檢)하지 않고 먼저 도강한 잘못을 물어 서장관을 파직한다는 명이 내려왔다. 의주 부윤은 이와 같은 비정상적인 사행에 대해 조정에 보고했던 것이다. 장석준은 “사행에서 짐바리가 함께 오거나 뒤에 오는 것은 흔히 있던 일이다. 의주에서부터 함께 경성에 올라가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며 해명하면서, 의주 부윤이 고지식하게 장계부터 먼저 올려 자신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었다며 비난했다. 철산→선천→평양→황주→개성→장단→홍제원을 거쳐 한양에 도착한 장석준은 궁궐에 들어가 고종에게 사행하면서 작성한 견문록과 일기를 바치는 것으로 사행을 끝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