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한국국학진흥원

사행 무역

무역물

중국과의 사행 무역에 있어서, 조선의 수출품은 금ㆍ인삼ㆍ종이ㆍ우피(牛皮)ㆍ명주ㆍ저포(苧布)ㆍ모물(毛物) 등이었고, 수입품은 비단ㆍ당목(唐木)ㆍ약재ㆍ보석류ㆍ문방구ㆍ신발류 등이다.

만상의 사무역을 허가하다!

조선 후기 정부는 만상의 사무역을 정부 감독 하에 인정하여 세입을 증대시키려는 목적으로, 만상 후시(灣商後市)를 허용하는 대신 그 수량 등을 제한하였다. 즉 만상이 수입해오는 연복 잡물의 수요를 절사 1만냥, 별행 5,000냥, 자행(咨行) 1,000냥으로 규정하는 한편, 은ㆍ인삼의 교역을 금지하고, 피물(皮物)ㆍ종이ㆍ주(紬)ㆍ저포(苧布)ㆍ면(綿) 등을 교역 대상 물품으로 규정하고 급여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정조 말에는 사행정사(使行正使)가 의주에 도착한 뒤 의주부윤과 상의해서 연행상금절목(燕行商禁節目)을 합의하여 작성하고 이를 기준해 만상의 무역을 감독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일정한 정액 무역권을 만포(灣包)라고도 불렀다.

연경 반입이 금지된 품목인 인삼

박사호(朴思浩)는 『심전고(心田稿)』에서, 연경에 가지고 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물건으로 금, 인삼, 담비가죽[貂]과 수달피[㺚]를 들고 있다. 그 가운데 인삼(홍삼) 꾸러미는 처음에는 40근에 지나지 아니하였는데, 해마다 늘어서 5000근에 이르렀음에도 연경 사람들은 그 값의 10배를 주고 사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몰래 거래한다고 하였다. 대개 5000근 꾸러미의 삼 이외에는 단 한 근도 금물이어서, 사행이 의주로 들어가던 날 밤에 의주 부윤이 샅샅이 뒤져서 일행 중의 정관(正官) 고경빈(高景斌)ㆍ이정식(李廷植)ㆍ김성순(金性淳)ㆍ이호기(李好基)가 잡혔고, 찰방 현운서(玄雲瑞)도 붙잡혀 돌아가게 된 사정을 기록하고 있다.

―『연계기정(燕薊紀程)』 무자년(1828, 순조 28) 11월

수레가 일제히 도착하였다. 큰 수레 6, 70대가 책 안에 죽 늘어서니 마치 돛대들이 무수히 들어서 있는 것 같다. 매년 사행(使行) 때에 은과 인삼이 연경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중국의 잡화로서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것으로, 비단 등과 약재나 바늘ㆍ모자ㆍ책 같은 쓸 만한 것 이외에 구슬ㆍ 부채ㆍ향(香)ㆍ당나귀ㆍ노새ㆍ앵무ㆍ융전(毧氈: 모직물)ㆍ거울ㆍ허리띠ㆍ종이ㆍ벼루ㆍ붓ㆍ먹 따위의 진기하고 괴상한 물건들은 나라의 보배가 아니라 부질없이 작은 나라의 사치하는 풍습만 조장하게 되니 참으로 작은 걱정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금물(禁物)은 금ㆍ삼ㆍ초피와 수달피이고 저 사람들의 금물은 병서(兵書)ㆍ무기[兵器]ㆍ낙타[駝]ㆍ말쇠[金鐵]ㆍ상모(象毛)ㆍ흑각(黑角: 무소뿔) 등의 물건인데, 모두 수색 검사한 후에 책문을 내보낸다. 그래서 잠상배(潛商輩)들의 눈을 치뜨고 모면하려는 꼴이란 가증스럽고 가소롭다.

중국에서 유명했던 무역품, 조선의 종이

그 연원이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조선의 종이는 고려 이후 오랜 무역품이었다. 17세기 중국의 유명한 기술서인 『천공개물(天工開物)』에서 조선의 백추지(白錘紙: 결백 (潔白)하고 질긴 백면지(白面紙))는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겠다고 할 정도로, 조선의 종이는 중국에서도 유명하였다.

그런데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는 “고려지는 두껍고 질겨서 찢어지지 않는 장점이 있으나 그대로는 거칠어서 글씨 쓰기에 적당하지 않고, 다듬이질을 하면 지면이 너무 굳고 미끄러워서 붓이 머무르지 않고 먹을 잘 흡수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고 하였다. 송나라에서 고려지를 최상품으로 여겼던 것은 그 당시에 고려에서 송나라에 공폐(貢幣)로 보내던 종이가 국내에서 사용되는 것보다 훨씬 우수한 것으로 특별히 제조된 것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김경선(金景善)은『연원직지(燕轅直指)』에서 중국의 종이 만드는 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김경선(金景善)『연원직지(燕轅直指)』 「유관별록(留館別錄)」

사대부 부유층의 수요로 대량 수입되었던 중후소의 모자

모자는 요동 중후소(中後所)에 있는 모자창(帽子廠)에서 생산되었는데, 주로 양털을 재료로 써서 제조한 방한용 모자였다. 18세기 후반 모자는 1년에 600척(隻)에서 1,000척 가량 수입될 수 있었다. 수량으로는 60만~100만 립(立)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였다. 수입된 털모자를 사용한 계층은 주로 사대부가의 남녀를 비롯한 부유층으로 추정된다. 정조 4년(1780) 중국에 다녀왔던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모자를 만드는 법은 매우 쉬워서 양털만 있으면 우리도 만들 수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양을 기르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은 해가 다 가도 고기 맛을 보지 못한다. 그리고 온 지역의 남녀가 수백만 명 이하는 아니며, 이들이 모자 하나는 써야 겨울을 넘긴다. 그러므로 동지사(冬至使)나 황력 재자관이 가지고 가는 은화(銀貨)를 계산하면 10만 냥이 못 되지 않으니, 이를 10년 동안 통산한다면 100만 냥이 된다. 모자는 한 사람이 삼동(三冬)을 지내기 위한 것으로 봄이 되어 낡으면 이를 버린다. 천 년이 가도 부패하지 않는 은으로 삼동이면 낡아서 버리는 모자를 바꾸고 산에서 캐낸 한정된 물건을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곳으로 보내다니, 어찌 생각하지 못함이 이처럼 심한가.”라고 하였다. 김경선은『연원직지』에서 박지원의 말을 인용하여 모자 무역의 폐단을 언급한 후에, “양을 길러서 그 털은 모자를 만들고 그 고기를 먹으면 모자로 은을 소비해 가며 타국에 의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흉년을 구제”할 수 있다고 하였다. 홍량호(洪良浩) 역시 1회성 소비재인 모자 수입을 경사 어디에서도 예법을 찾아볼 수 없는 물건이라며 강력히 비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