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주(薊州)의 초행래(初行禮)
계주에 이르면 사행에 처음으로 참여한 역관이 선배 역관들에게 돈을 내서 술과 음식을 성대히 차리는 것이 전례가 되었는데, 이를 초행례(初行禮)라 한다. 굉장히 성대했는지 김창업도 얻어먹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세 그릇을 받았는데, 하나는 계란찜, 또 하나는 닭고기 국, 나머지 하나는 과일이었다. 홍시ㆍ 포도ㆍ 산사(山査: 아가위)ㆍ감귤ㆍ배가 담겨있었다. 홍시는 조선 감보다 갑절이나 크고 맛도 좋았으며, 포도는 조선의 자포도(紫葡萄)와 같은데 맛이 그보다 훨씬 좋았다고 적고 있다.
풍윤(豊潤)과 옥전(玉田)의 나귀
풍윤과 옥전 사이의 상인들은 참에서 묵어가는 사람들에게 나귀를 세내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다. 나무로 만든 안장이어서 앉는데 불편했고, 나귀의 키가 작아 발을 벗고 물을 건너는 수고를 대신해 줄 정도로 옹색했다. 삯도 15리 길에 겨우 동전 30닢 밖에 안 될 정도로 적었지만, 그곳 상인들은 나귀를 끌고 다니며 결사적으로 손님을 찾았다. 사행의 짓궂은 하인들이 탈 것처럼 말하며 따라오게 하다가 중간에 그냥 가버리곤 했는데, 몇 리를 뒤쫓아 오다가 맥없이 돌아가곤 하였다.
영평부(永平府)의 닥나무와 뽕나무
영평부 서쪽 들판에 펼쳐진 밭의 반이 닥나무와 뽕나무였다. 잎사귀로는 누에를 치고, 껍질로 종이를 만들었다. 경작지 주변의 빈곳에 심는 것이 아니라 조금도 구부러지거나 비뚤어짐이 없이 밭에 줄지어 심었다. 누에고치나 종이는 환금성이 강한 품목이고, 워낙 대규모로 경작하기 때문에 그곳 농민들은 다른 농사를 짓지 않아도 생활할 수 있었다.
중국의 김치
연행록에는 김치 종류가 여럿 보인다. 대체적으로 그곳 김치[沈菜]는 매우 짜서 물에 담가 두어 소금기를 뺀 뒤에 가늘게 썰어 먹었다고 하였다. 맛있는 김치로는 대릉하의 어차과(魚?瓜)를 첫손에 꼽았다. 대릉하에서 잡은 곤쟁이로 젓갈을 담아 오래 묵이면 젓국이 기름처럼 맑아진다. 이 젓국에 작은 오이를 담그면, 오이가 갓 딴 순무처럼 시퍼렇다. 이를 노하고(鹵蝦苽)라고도 한다. 영원과 풍윤의 동치미는 조선 동치미와 맛이 비슷하다고 하였다. 갓김치[芥沈菜]와 포기김치[?沈菜]는 가는 곳마다 있는데 맛도 좋지 않으면서 짜다고 하고, 갖가지 장아찌[醬瓜]가 있는데 맛이 좋지 못하다고 하였다. 조선 포로들의 후손인 통관(通官)의 집에는 조선의 김치 만드는 법을 모방하여 맛이 꽤 좋았다.
중후소(中後所)의 털모자
동관역을 지나서 있는 중후소에는 털모자점이 3곳이나 있었다. 한 점포가 4,50칸씩이나 되었고, 모자를 만드는 기술자들이 백 명씩 모여 일을 하고 있었다. 의주의 상인들은 북경에 들어가면서 계약하고, 돌아가는 길에 마치에 실어 옮겼다. 모자는 양털을 가지고 만들었는데, 그렇게 어려운 기술이나 공정을 요구하지 않았다. 박지원은 양털만 있다면 자신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며, 조선 사람들이 만들어 쓸 생각은 하지 않고 귀한 은자를 낭비한다고 비판하였다. 모자를 만드는 점포의 주인은 의주 상인이 올 때는 반드시 한바탕 잘 차려 대접하였다.
일판문(一板門)의 물맛
심양을 지나서 일판문(一板門)과 이도정(二道井)의 사이는 물맛이 나쁘기로 이름이 높았다. 이곳은 요동 너른 들판 가운데에 있어, 물과 샘이 모두 고여 있기만 하고 빠지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연행사들은 신 듯도 하고 떫은 듯도 하여 실로 입을 대기가 곤란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간신히 마른 떡을 삼키고, 팔팔 끓는 물에 차를 타서 겨우 두어 모금 들이마셨다고 하였다.
요동(遼東)의 꿩
사행들이 요동벌을 걸으면서 꿩을 사서 먹었다는 기록이 여럿 보인다. 기름지고 연하여 조선의 꿩보다 훨씬 맛있었다. 다만 꿩의 살과 뼈마디 속에 박힌 엽총 탄환의 작은 쇠구슬을 빼내지 않는 경우가 있어 씹다가 이를 많이 다치기도 하였다.
냉정(冷井)의 미나리
냉정은 석문령(石門嶺)과 왕보대(王寶臺) 사이에 있는 우물이다. 깊이는 반 길에 지나지 않지만, 땅속으로 뻗은 물줄기가 깊어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여 물맛이 좋았다. 조선의 사신이 도착하면 샘물이 막 흘러나왔고, 길을 떠나면 곧 말라붙었다고 한다. 우물에서 나온 물은 주변으로 흘러내렸고, 물이 차지 않아 들미나리가 많이 자랐다. 귀로에 오른 사행은 늘 여기서 들미나리를 캐어 먹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