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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행 연희

연희 기록

16~17세기 연행록에 나타난 연희 기록

대부분의 16~17세기 연행록에서 연희(演戱) 기록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허봉(許葑)의 『조천기(朝天記)』에 가면희(假面戱)에 관한 단편적인 기록이 보일 뿐이다.

18세기 연행록에 나타난 연희 기록

연희에 관한 기록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18세기에 들어서이다. 이 시기 이후 대부분의 연행록에서 연희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18세기 연행록에 보이는 연희 관련 기록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는 다음과 같다.

최덕중(崔德中)의 『연행록(燕行錄)』

[1712년(숙종 38)]에는 북경 예부(禮部)의 풍악(風樂)과 잡희 정재(雜戱呈才), 북경 숭문문의 장난감 솔개놀이와 장난감 원숭이놀이를 기록하고 있다

김창업(金昌業)의 『연행일기(燕行日記)』

[1712년(숙종 38)]에는 북경 십산산 찰원의 원희(猿戱)와 견희(犬戱)를 기록하였다.

서호수(徐浩修)의 『연행기(燕行記)』

[1790년(정조 14)]에는 열하 피서산장의 연희전(演戱殿)과 그곳에서 본 연제(演題) 16장의 연희(演戱) 2종, 북경의 원명원에서 본 연희 서유기(西遊記)와 연제 16장의 연희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김정중(金正中)의 『연행록(燕行錄)』

[1791년(정조 15)]에는 연 4일간이나 계속된 해전(海甸)의 등희(燈戱), 정조 16년(1792) 북경의 유리창에서 본 3가지의 창우희(唱憂戱), 그해 원명원에서 본 각희(脚戱)ㆍ서양추천(西洋鞦韆)ㆍ회자정희(回子庭戱)ㆍ등희(燈戱) 등 4장의 연희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서유문(徐有聞)의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1798년(정조 22)]에는 연광정과 백상루의 기악(妓樂), 청나라 왕실의 희자습의(戱子習儀), 유리창의 광대놀이[唱戱]와 환술(幻術) 등이 기록되었다.

19세기 연행록에 나타난 연희 기록

19세기 연행록에 보이는 연희 관련 기록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는 다음과 같다.

박사호(朴思浩)의 『심전고(心田稿)』

[1828년(순조 28)]에는 황주의 기악(妓樂), 유리창과 옥하관의 연희, 원명원의 등불놀이, 원명원의 연희 곧 가화우선의 춤ㆍ씨름놀이ㆍ사자춤ㆍ홍봉환축(紅棒環逐)에 대해 아주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박사호는 북경 원명원에서 본 등불놀이를 「태평춘등기(太平春燈記)」라는 별도의 독립 항목으로 기록하였고, 원명원 산고수장각(山高水長閣)의 불꽃놀이를 「매화포기(梅花砲記)」라고 기록하였다. 그는 연희청과 각종 연희에도 두루 관심을 보였는데, 「연희기(演戱記)」에서 연희의 유래, 연희청, 연희의 제목, 내용, 관객 등에 관해서도 상세하게 적고 있다.

저자 미상의 『부연일기(赴燕日記)』

[1828년(순조 28)]에는 북경 광대놀이의 음절(音節), 중국의 상악(喪樂), 연산관과 북경의 광대놀이, 다른 연행록에서 보기 어려운 새로운 연희 잡희(雜戱)를 소개하고 있다.

김경선(金景善)의 『연원직지(燕轅直指)

김경선의『연원직지(燕轅直指)』1832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소장

[1832년(순조 32)]에는 북경 정양문의 장희(場戱)와 풍악놀이, 원명원의 지포희(紙砲戱), 원명원의 등희(燈戱), 옥하관의 웅희(熊戱), 청나라의 악공과 악기, 청나라의 기예(技藝), 백상루의 기악(妓樂)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특히 그는 「옥하관기」, 「장희기(場戱記)」, 「제희본기(諸?本記)」, 「원소등화기(元宵燈火記)」, 「지포기(紙砲記)」, 「웅희기(熊戱記)」라는 별항을 설정하여 연희에 대한 상당한 조예를 가지고 연희기를 체계적으로 작성하였다.

서경순(徐慶淳)의 『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

[1855년(철종 6)]에는 극장(劇場)과 배우 곧 희자(戱者), 심양의 등희(燈戱), 요동성의 등희(燈戱)에 관해서 쓰고 있다.

18~19세기 연행록의 연희는 조선과 청의 관계를 정상적 외교 관계로 승화시키는 데 기여하였으며, 한ㆍ중 양국 간의 긴장을 완화시키고, 문화적 교류를 활성화시키는 데 기여한 바 크다.

― 참고: 임기중, 『연행록연구』, 일지사, 2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