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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행 단계

북경 입경기

<연행도>,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 소장. 북경에서 활동하는 조선 사신의 모습.

예부의 회동관에 조선 사행 도착을 알리다

사행이 북경에 들어가는 날에는 청나라 쪽의 영송관(迎送官)과 아역(衙譯: 통역관)이 앞의 참(站)에서 먼저 달려가 조선 사신의 북경 숙소인 예부(禮部)의 회동관(會同館)에 조선 사행의 도착을 알린다. 나중에 옥하관(玉河館)이라고 불리는 회동관 소속의 아역 몇 사람이 나와 동악묘(東岳廟)에서 조선 사행을 맞이한다. 이때 삼사는 공복을 갖추어 입고, 행렬의 앞을 인도하는 전배(前輩)와 타고 오던 교자(轎子), 해를 가리던 일산(日傘)을 없앤다. 사행은 아역의 인도를 받아 제화문(齊華門)으로 들어가 회동관으로 향한다. 회동관에 다른 나라 사신이 들어와 있으면 다른 곳으로 옮긴다. 관소에 이르면 책임자인 제독(提督) 이하 여러 아역들과 행정을 맡은 하급관리, 심부름을 하는 일꾼[館夫]와 종[皁隷]들이 문 앞에 줄을 지어 있으면서 사신을 맞아들였다.

모든 공식 인원이 공복을 갖추고 예부에 나가 표문과 자문을 바치다

관소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정사 이하 모든 공식 인원이 공복을 갖추고 표문과 자문을 받들고 예부로 나아갔다. 예부 상서와 낭중(郎中)과 함께 공복을 갖추고 삼사를 맞이하였고, 삼사는 무릎을 꿇고 앉아 표문과 자문을 바쳤다.

홍려시에서 황제를 만나기 위한 의식을 연습하다

삼사는 조회에서 황제를 만나기에 앞서 홍려시(鴻臚寺)에서 의식을 연습하였다. 정사 이하 공식 인원 모두가 참여했으며, 몸이 아파 결원이 있으면 만상군관에게 옷을 입혀 대신하게 하였다. 삼사신이 맨 앞줄에 서고, 당상역관부터 압물관에 이르기까지 27명은 9명씩 3줄을 이루어 그 뒤에 차례로 섰다. 절하라는 소리에 맞춰 일제히 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바닥에 두드리는 예[三拜九叩頭]를 행하였는데, 한 사람도 틀리지 않을 때까지 연습해야 했다.

태화전에 나가 황제를 알현하다

정월 초하루 새벽 황제가 태화전(太和殿)에 나아가면, 조선 사신은 몽골을 비롯한 다른 외국의 사신들과 함께 서반(西班)의 뒷자리에 서서 삼배구고두의 예를 올렸다. 정사가 1품의 왕족이면 궁전 안에 들어가 청나라의 5등 제후(諸侯)의 말석에 앉아 차(茶)를 마시고 파하기도 하였다. 가지고 간 방물과 세폐는 당상역관과 압물관이 품목별로 호부의 창고와 황궁의 내탕고(內帑庫: 황실의 창고) 등에 바쳤다. 물건을 받은 곳에서는 각기 예단을 내어주었다.

사행의 노고를 치하하는 하마연을 베풀어주다

황실에서는 조선 사행이 노고를 치하하는 잔치를 베풀어 주었는데, 이를 하마연(下馬宴)이라고 한다. 명나라 때에는 사신의 숙소인 회동관에서 이루어졌고, 청나라에서는 예부에서 이루어졌다. 예부 상서가 나와 주재하는 이 연회에서는 음악이 연주되었고, 술이 나왔으며, 연극과 마술과 같은 잡희(雜戱)가 베풀어졌다. 사행이 돌아가기 전에 베풀어주는 잔치를 상마연(上馬宴)이라 하였는데, 하마연(下馬宴)과 같은 절차였다.

사행이 귀국하기 전에 황제가 상을 내리다

사행이 귀국하기에 앞서 황제는 조선 사신에게 상을 내려주었다. 명나라 때는 새벽에 황궁에 들어가 황제에게 인사를 하고 물러나와 예부에서 받았고, 청나라 때에는 황궁에 들어가기는 하나 예부를 비롯하여 해당 관청의 책임장에게 예물을 받았다. 삼사, 당상역관 3명, 압물관 24명의 순으로 물건을 받고, 감사함을 표하는 예를 올린 후 파했다.

북경에 머무는 동안 숙소에서 무역을 행하다

사행은 북경에 머무르는 동안 숙소에서 무역을 행하였다. 예부에서는 매매의 한쪽 당사자에게 이익이 쏠릴 것을 막기 위해, 관리를 임명하여 매매를 감독하여 공평하게 교역하도록 하였다. 특히 병기(兵器: 무기), 화약의 원료인 염초(焰硝), 활의 재료가 되는 우각(牛角) 등 무역금지품목의 거래를 엄격하게 감시하였다. 예부에서는 산해관과 봉황성에 공문을 보내 사행 도중에 교역하는 것을 방지시키기도 하였다.

예부에 출발한다는 글을 올리고 조선을 향해 출발하다

사행의 일이 끝나면 예부에 출발한다는 글을 올렸다. 명나라 때에는 황궁에 나아가 떠난다는 인사[辭朝]를 하였는데, 청나라 때에는 상통사를 예부에 보내 자문(咨文)을 받아오는 것으로 간소화되었다. 해당 관청에서 역마ㆍ마부ㆍ말ㆍ차량과 음식물을 관례대로 내어주면, 사행은 조선을 향하여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