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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사행 문화교류

사상

“만일 큰 선비를 만난다면 장차 무엇으로써 질문을 하여 그를 애먹여 볼까”

박지원,『열하일기(熱河日記)』1751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박지원은 열하의 태학에서 중국의 학자 윤가전(尹嘉銓)ㆍ기풍액(奇豐額)ㆍ왕민호(王民皥)ㆍ학성(郝成) 등과 두 나라의 문물ㆍ제도에 대해 토론한다. 그 가운데 박지원은 혹정 왕민호와 이야기한 것이 제일 많다고 하였다. 연암은 혹정을 일러 “진실로 굉유(宏儒)요 괴걸(魁傑)이다.”라고 할 만큼 그는 뛰어난 학자였다. 연암은 요동벌을 건너면서 “말 위에서 혼자 학식이 본래 없는 나로서 이번 중국에 들어가 만일 큰 선비를 만난다면 장차 무엇으로써 질문을 하여 그를 애먹여 볼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는 “지전설(地轉說)이라든가 월세계(月世界) 이야기를 찾아내어, 매양 말고삐를 잡고 안장 위에 앉은 채 졸면서도 누누(累累) 수십만 마디의 말을 연역(演繹)해서, 가슴속에 글자 아닌 글을 쓰고 하늘에 소리 없는 글을 읽어가면서 하루에 몇 권의 책을 꾸몄다.”고 하였다. 이렇게 꾸민 화제는 청나라의 큰 선비와의 만남에서 긴요한 화제가 된다. 혹정은 세계에 대해 논할 만한 연암의 파트너였던 것이다. 필담하는 사이에 수십 장이나 되는 종이를 허비하고, 인시(寅時)에서 유시(酉時)까지 무려 8시간씩 이루어진 그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혹정필담(鵠汀筆談)」에 실려 전한다.

“굉장히 박식하고 말을 좋아하는 선비라 이를 만하거늘...”

연암 박지원이 열하(熱河)에 들어간 뒤에 이런 화제들을 들고 안찰사(按察使) 기풍액(奇豐額)에게 소개했더니, 풍액도 수긍은 했으나 전혀 이해는 못하였고, 혹정과 지정은 역시 분명히 알아듣지 못했으나 혹정은 이 학설을 그렇게 틀렸다고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혹정의 사유는 열려 있었다. 연암은 이런 혹정을 두고 “대개 혹정은 문답하는 데 민첩하여 종이를 잡으면 문득 수천 마디의 말을 내려 써서 종횡으로 떠벌리고, 천고의 경(經)ㆍ사(史)ㆍ자(子)ㆍ집(集)을 손에 닿는 대로 들춰내어 아름다운 구와 묘한 게(偈)가 입만 열면 선뜻선뜻 만들어지지만, 모두 조리에 닿고 맥락이 어지럽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혹정이 “굉장히 박식하고 말을 좋아하는 선비라 이를 만하거늘 백두(白頭)인 채 궁한 처지로 장차 초목으로 돌아가려 하니 정말 슬픈 일이다.”라고 하였다. 나라를 잃거나 적서의 차별로 신분의 제약을 받고 그 큰 뜻을 펼치지 못하던 동아시아 선비들의 모습은 빛나던 중세의 우울한 그림자였다. 이처럼 박지원이 중국인 선비들과 만나 이룬 우정의 지도에는 18세기 동아시아의 변화된 역사와 사회 인식 그리고 서양 문물에 대한 태도 등이 그려져 있었다.

황교와 서학에 대해 논하다

피서산장의 라마교 성지인 보타종승지묘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는 이밖에도 황교(黃敎: 티벳불교)와 서학(西學)에 관하여 중국인 선비들과 논하는 대목이 있다. 「찰십륜포(札什倫布)」는 열하에서 반선(班禪)에 대해 기록한 것으로, 찰십륜포는 서번어(西番語)로 ‘대승(大僧)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반선시말(班禪始末)」은 청(淸) 황제가 반선에게 행한 정책(政策)에 대하여 논하였고, 또 황교(黃敎)와 불교(佛敎)가 근본적으로 같지 않음을 밝혔다. 황교문답(黃敎問答)은 당시 천하의 정세를 파악하여 오망(五妄)ㆍ육불가(六不可)를 논하였다. 그것은 모두 북학(北學)의 이론이었으며, 또는 황교와 서학자(西學者)의 지옥(地獄)의 설에 대한 논평이다. 그 말미에는 또 세계의 이민종(異民種)을 열거하였으되, 특히 몽고(蒙古)와 아라사(俄羅斯) 종족의 강맹(强猛)함에 대하여 주의하여야 할 것을 논하였다.

서학과 서교에 대한 논의를 펼친 홍대용

북경 남천주당 전경

서학과 서교에 대한 논의는 홍대용의 『연기(燕記)』에서 보다 자세하다. 홍대용은 북경 남천주당의 서양 신부들인 유송령(劉松齡, August von Hallerstein)ㆍ포우관(鮑友官, Anton Gogeisl)과 필담한 「유포문답(劉鮑問答)」에서, 서양의 천문(天文)과 산수(算數)에 관한 깊은 대화를 나눈다. 이와 함께 홍대용은 유교에서는 오륜(五倫)을 숭상하고, 불교에서는 공적(空寂)을 숭상하고, 도교에서는 청정(淸淨)을 숭상하는 중국과는 달리, 서양의 학문에서 숭상하고, 존귀하게 여기는 것을 묻는다. 이에 두 신부는 “우리나라의 학문은 사람들에게 사랑함을 가르칩니다. 하느님을 높이되 만유(萬有)의 위에 숭배하고, 남을 사랑하되 자기 몸처럼 합니다.”라고 답한다. 그리고는 그 사랑은 “공자의 이른바 ‘교사(郊社)의 예는 상제(上帝)를 섬긴다.’란 그것이고, 도교에서 말한 ‘옥황상제(玉皇上帝)’는 아닙니다.”하고는, “시경(詩經)의 주(註)에서도, ‘상제(上帝)는 하늘의 주재(主 宰)’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하여, 서양의 천주(天主)와 유교의 상제(上帝)가 하늘의 주재라는 측면에서 유사함을 밝히고 있다.

고증학의 성장과 시대적 요구에 의한 전파

고증학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엽에 걸쳐 전성기를 맞게 된다. 청초 학자들은 주관적으로 경전을 해석하던 주자학과 양명학의 경전 연구 태도를 비판하며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중시하게 되었다. 한편, 만주조정에 의한 강력한 사상통제와 『사고전서(四庫全書)』와 같은 대대적인 편찬사업이 지식인의 고증벽을 조성하였고, 강남의 도시들이 경제적 발전을 이루어 지식인의 경제적 여건을 향상시켰다. 인쇄술의 발달과 민간 장서의 성장, 서적 시장의 성립 등이 고증학의 중요한 성장배경이 되었다. 한편, 청 조정의 정치, 사회적 안정 역시 비실용적 학술에까지 힘을 쏟게 했으며, 명말 이래 다소 시민사회적인 자유로운 기풍이 청조 지식인의 의식 속에 침투하여 학문과 생활에서의 실천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관학이던 정주학의 권위와 금욕성에 반하는 고증학이 성장할 수 있었다. 조선과 청 학자들의 교유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가운데 조선의 학자들이 청 고증학을 수용한 구체적 흔적은 이덕무(李德懋)와 심염조(沈念祖)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1776년 북경을 방문한 이덕무는 고염무의 『일지록(日知錄)』을 보고 그 놀라움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심염조는 오류거에서 『고정림집(顧亭林集)』을 입수하고는 이덕무에게 그 탁월함을 역설한다. 이처럼 청 고증학자들의 저서가 국내에 소개되면서 고증학에 대한 지식인들의 학문적 관심이 더욱 촉발되고 문화 전반에서 새로운 경향이 형성된다. 18ㆍ19세기 고증학의 수용과 저변의 확대는 중국 문물에 대한 수요가 증폭되고 중국으로부터 방대한 서적이 유입되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연행이 거듭되면서 청나라에 대한 지식인들의 관심이 고조되고 북학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되어 청의 학술, 문화 등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요구들이 일어났다. 중국서적의 대량 수입과 장서가의 출현은 고증학풍의 대표적 특성인 ‘박학의 추구’라는 변화된 학문 경향의 밑거름이 되었다. 장서가들은 소장하고 있는 방대한 자료를 근거로 변증을 통한 사실에의 접근을 시도할 수 있었으며, 인격 수양과 성리문자(性理文字)에 대한 치밀한 사색을 위주로 하는 과거 학문태도와는 그 성향을 매우 달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