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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행 종류

사행 횟수

‘조천행’과 ‘연행’ 조선에서 명나라로 가는 사행은 천자(天子)를 뵙고 온다[朝會] 하여 조천행(朝天行)이라고 한다. 한편 청나라로 가는 사행은 수도인 연경(燕京: 北京)을 다녀온다 하여 연경행(燕京行), 줄여서 연행(燕行)이라고 한다.

「항해조천도」 중 일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행단이 떠나는 모습

「항해조천도」 중 일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행단이 떠나는 모습

심양의 칸과 북경의 황제를 만나러 가다! 조선과 청이 형제의 의를 맺은 정묘호란부터 임금과 신하[君臣]의 의를 맺은 병자호란 때까지 육로로 심양의 칸[汗]을 만나러 가는 사절과 해로(海路)로 북경의 황제를 만나러 가는 사절이 공존했다. 이때 심양으로 가는 사절은 1년에 2회씩 소식을 주고받는다는 의미에서 춘신사(春信使)와 추신사(秋信使)로 불렸으며, 문관(文官) 대신 무관(武官)이 사신이 되었다. 명나라는 조선에게 1년 3공(貢)이라 하여, 정조사ㆍ동지사ㆍ성절사와 같은 3회의 정기사행을 허락했다. 1531년(중종 26)부터는 정조사?동지사?성절사에 천추사가 추가되어 1년 4절행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조선 초기(1392)부터 임진왜란 직전(1591)까지 명나라에 보낸 사행은 정기 사절이 477회, 비정기 사절이 576회였다. 세종 연간의 예를 들어보면 조선은 198회, 명은 36회의 사신을 파견하여, 약 5배가량 조선 사절이 많았다.

북경 천도 후부터 조선 개항까지 612회를 가다 조선이 칸을 황제(皇帝)로 인정한 1637년(인조 15)부터 청 사이에 정상적인 외교관계가 성립되었다. 이후 심양으로 총 61회의 사행이 있었고, 1644년(인조 22) 북경으로 천도한 뒤에 조선이 개항한 1876년까지 총 612회의 사행이 있었다. 명 때에 비해 사행 횟수가 적은 것은 청이 조선의 번거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4절행을 하나로 만들어 ‘동지사(冬至使)’라 칭하고, 1월 1일에 맞추어 들어오도록 했기 때문이다. 같은 기간 청나라에서 조선에 보낸 사행, 곧 황제의 명령을 적은 문서를 전달하는 칙사(勅使)는 총 165회로 약 4배 가량 조선 사절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