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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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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괴한 러시아 풍속을 관람하다
줄거리

아침에 러시아관에 가보니 ‘회동관(會同館)’이라는 편액을 달아놓았다. 여기가 바로 원래의 ‘옥하관(玉河館)’으로 옥하교의 서쪽 길가에 있다. 당초 우리나라 사신들이 머무르던 곳이었다. 지금 우리나라 사신들은 남관(南館)으로 이전했다. 러시아관은 집이 넓고 탁 트여 있어서, 남관에 비해 배나 넓고 또한 빈 공간도 많이 있었다. 집안의 기물이 섬세하고 기이했는데 치수를 재는 기계들은 방마다 있었다. 곳곳에 걸린 그림은 사람, 가축, 궁실, 수목, 산수 등을 그린 것이었다. 또 방마다 자명종이 있었고, 스스로 울리는 악기(축음기)가 있었는데 이것들은 감실처럼 생겼다. 러시아국 사람들은 10년에 한 번씩 번갈아 이곳에 머물렀다. 그 사람들은 얼굴이 하얬지만 몸에 난 털은 누랬다. 코가 날카롭고 우뚝하며, 눈이 우묵하고 노랬다. 키는 8척이나 되었다. 10여명을 보았는데 대체로 다 그랬다. 이곳저곳을 두루 구경하고 어떤 곳에 이르렀는데, 문이 잠겨 있었다. 자물쇠를 열게 하고 들어가 보았더니 머리와 사지에 쇠못이 박힌 사람이 걸려 있었다. 말몰이꾼이 이곳의 괴상한 모습에 대해 묻자 이곳에 사는 오랑캐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책을 꺼내 보여주었다. 과일 한 접시와 사과 한 접시를 가져왔기에 각각 1~2개씩 먹고 청심환과 담배 등의 물건을 그에게 주었다. 그는 먹지 않는다고 사양하였다.

번역문

맑음.
아침에 러시아관(館)에 가보니, 문에 ‘회동관(會同館)’이라는 편액을 달아놓았다. 여기가 바로 원래의 ‘옥하관(玉河館)’으로 옥하교의 서쪽 길가에 있다. 당초 우리나라 사신들이 머무르던 곳이었다. 지금 우리나라 사신들이 머무는 곳은 남관(南館)으로 이전했다. 러시아관은 집이 넓고 탁 트여 있어서, 남관에 비해 배나 넓고 또한 빈 공간도 많이 있었다.
집의 규모가 정밀하고 특이했고, 집안의 기물이 섬세하고 기이했다. 치수를 재는 기계들은 아주 세밀하게 만들어져 있었는데, 방마다 모두 그게 있었다. 곳곳에 걸린 그림들은 사람ㆍ가축ㆍ궁실ㆍ수목ㆍ산수 등을 그린 것들이었다. 길이와 너비가 두어 자씩이 되고, 액자틀은 특이한 나무로 만들었고 유리를 덮었다. 벽마다 여러 그림이 걸려 있었다. 멀리서 볼 때는 그림 속 사물이 분명하지 않았는데, 돋보기를 끼고 가까이 가서 보니 한 치 크기의 말, 콩알 만한 사람이 살아 움직이듯 섬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 그림 솜씨가 정말 훌륭했다.
또 방마다 자명종이 있었는데, 어떤 것은 크고 어떤 것은 작은 것이었다. 어떤 곳에 가보니 키가 크고 감실처럼 생긴 자명종이 있었는데, 자명종 이마에는 달처럼 크고 유리로 만든 구멍이 있었다. 때가 되면 비둘기 한 마리가 그 구멍 속에 나와서 시간에 맞추어 울었다. 다 울면 다시 머리를 집어넣고 안으로 들어갔다. 매우 희한하였다.
또 스스로 울리는 악기(축음기)가 있었는데 이것 역시 모양이 감실처럼 생겼다. 기다란 관을 들어 올리고 나팔 부분을 비틀면 음악이 큰 소리로 연주되었다. 온갖 악기 소리가 번갈아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러시아국 사람들은 10년에 한 번씩 번갈아 이곳에 머물렀다. 그 사람들은 얼굴이 하얬지만 몸에 난 털은 누랬다. 코가 날카롭고 우뚝하며, 눈이 우묵하고 노랬다. 키는 8척이나 되었다. 10여 명을 보았는데 대체로 다 그랬다.
양 옆으로 책이 많이 꽂혀 있었는데, 책의 글은 모두 가로로 써 있었고, 글자는 알아보기 어려웠다. 중국의 경서도 섞여 있었다.
그들 나라의 풍속은, 이른바 천주학(天主學) 외에는 다른 학문이 없다고 한다. 그들의 서적 가운데 더러 중국 글자로 번역하여 종이에 써놓은 것이 있어서 살펴보았다. 2〜3줄 읽어보니 분명 이단의 학문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이 이단의 학문은 이들뿐만 아니라 서쪽이나 남쪽의 먼 변방 사람들은 똑같다. 이들은 애초부터 공자님의 가르침을 몰랐기 때문에 서양에서는 천주학을 공부하지 않는 데가 없을 것 같았다.
이들 오랑캐는 자기들의 본래 풍속이 이단을 숭상하는 것일 뿐이라 정도(正道)의 중국 문명을 새롭게 배우기 위해 북경의 관사에서 머무는 것이다. 이들은 중국의 글을 자기 나라 백성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10년 기한으로 20명을 교대하여 중국에 머물면서 중국의 문자를 익힌다. 그런 다음 귀국하여 중국 문명을 전파함으로써 먼 나라에서도 성인의 도를 알리는 것이다. 이들의 언어와 문자가 중국의 것과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렇게 관사에 살게 하는 방법이 아니고서는 중국의 문명을 가르쳐 알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야말로 사람을 교화시키는 좋은 규정이라고 생각된다.
이곳저곳을 두루 구경하고 어떤 곳에 이렀는데, 문이 단단히 잠겨 있었다. 자물쇠를 열게 하고 들어가 보니, 외간에 가로 막은 칸막이가 있는데 모두 특이한 나무로 조각해 놓았고, 칸막이마다 모두 산발한 사람 모습을 그려 놓았다. 방 안 사방에는 구부정하게 벽돌로 높이 쌓았고, 서로 비치는 둥근 창문은 모두 유리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 칸막이를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앞의 큰 벽에 죽은 사람이 걸려 있었다. 벽 위에 십자 모양의 나무판자를 붙였고, 그 위에 머리와 사지(四肢)에 쇠못이 박힌 사람이 걸려 있었다. 마치 거열형(車裂刑)을 당한 사람 같아 보였는데, 몸에는 뼈만 앙상하였다. 피부와 살, 손톱과 털은 꼭 산 사람과 같았는데 온몸은 벌거벗었다. 진짜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지만, 머리와 사지에 박힌 쇠못 자리에서는 붉은 선혈이 쏟아져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방금 죽어서 아직 몸의 온기가 식지도 않은 것 같아 보였다. 현기증이 나서 바로 보기 힘들었다.
또한 방 안에는 침향(沈香)ㆍ단향(檀香)의 목재를 많이 사용하여 향기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고, 또 바람이 조금도 통하지 않아 음습하고 피비린내 같은 냄새가 풍겼다. 속이 메슥거리고 편하지 않았다. 우연히 오게 된 것이지만 좀 후회스러웠다.
말몰이꾼이 이곳의 괴상한 모습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자 이곳에 사는 오랑캐가 대답했다.
“옛날에 예수님이란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서양의 신명한 성인이십니다. 도학이 고명하고 영험함이 오묘하였는데, 요망하고 허탄하다는 죄를 입어 이 같은 형벌을 받아 돌아가셨습니다. 서양 사람들이 그 분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추모하기 위해 사당에 모셨고 그 돌아가신 형상대로 소상(塑像)을 만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서양 사람들은 모두 머리를 풀어 헤치고 맨발로 그분을 따르는 풍속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사악한 학문을 하는 무리들이 형벌을 받아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진실로 이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
정양문(正陽門) 밖 길에 어떤 사람이 머리를 풀어 헤치고 맨발로 다니는데, 수염이 파랗고 기골이 준수하며 기운이 팔팔하여 빈곤하거나 근심스러운 모습이 없었다. 그 사람은 손에 작은 버드나무 바구니를 들고 점포를 차례대로 지나면서 가게 안을 들여다보고 소리쳤다. 그러자 사람들이 앞 다투어 그 사람에게 돈을 던져 주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소란스러웠고 잠시 동안에 그의 바구니는 가득 채워졌다. 그는 서방 사람인 것 같았는데, 중국 사람들은 재물을 벌기 위해 적선하는 풍속으로 그 사람을 대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일 뿐이었다.
이어 어떤 방을 지나다가 붓으로 써서 물어보았다. 그러자 키가 아주 크고 수염이 덥수룩한 오랑캐가 의자에 기대앉아 스스로를 이라고 말했다.
“이름은 자칭 강보록(康保錄)이고 관사에 있은 지 8년이며 나이는 63살입니다. 그 나라는 중국에서 28,000리나 됩니다. 2년 후에 귀국하게 되는데 몇 해가 걸려야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나라의 사방 인접 나라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답했다.
“남쪽으로는 중국과 이웃하고 있고, 동쪽으로는 일본과 맞닿아 있는 커다란 얼음바다입니다. 북쪽의 경계는 서양이고, 서쪽 경계는 이슬람 국가입니다.”
지도에 따라 따져본다면, 러시아는 사막 밖 아주 외진 변방에 있고, 천지의 서북 모퉁이인 정서북 방향에 있다. 그러니 이 오랑캐는 방향을 세계의 방향에 대해 모르는 것이다.
이 오랑캐가 자기 책을 꺼내서 나에게 주었다. 내가 물리쳤더니, 그가 말했다.
“우리나라의 왕공대인들과 도덕이 고명한 분들이 모두 이 책을 읽습니다.”
또 과일 한 접시와 사과 한 접시를 가져왔다. 각각 1〜2개씩 먹고 청심환(淸心丸)과 담배 등의 물건을 그에게 주었다. 그는 먹지 않는다고 사양하였다.
이 오랑캐들은 우리에 대해 상당히 정성스럽게 예우하였다. 그래서 드나들 때에 항상 읍하고 인사했다. 이들의 모습을 보니, 모두 오랜 시간 객지생활에 시달려서 고단하고 쓸쓸한 기색이 보였다. 탐욕스럽고 사납거나 야비한 기색은 없어 보였다. 다만 그들이 세속에서 숭상하는 학문이 해괴하고 사악한데, 어떻게 해야 중국의 교화로 그들의 풍속을 고칠 수 있을까? 학문이 몹시 이상하여 절대로 가까이 할 수 없을 것 같다. 또한 그들의 천주당은 너무도 해괴하고 참혹한 모양이라 눈을 뜨고 볼 수가 없다. 우리나라에 돌아가면 연경 가는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이 관사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당부해야 하겠다.
선무문(宣武門) 안쪽 내성(內城) 동쪽 성 밑 길가에도 서양인의 집이 있는데, 거기에도 천주당이 있다. 밖에서 보니 집 모양이 아주 기묘하였다. 크기는 옥하관보다 배나 컸고 기이한 구경거리가 많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신유사옥(辛酉邪獄)이 일어난 뒤로 우리나라 사람은 이 집에 들어가는 일이 없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