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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이야기 조각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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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해정에 가다
줄거리

산해관 남쪽의 망해정을 시간을 내어 둘러보러 가는데, 정자를 관리하는 중국인이 청심환을 요구하였다. 망해정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주겠다고 속이고, 망해정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바다와 산이 어우러져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머리털이 설 정도로 대단한 경관이었다. 또한, 자신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느끼게 되었다. 서쪽으로는 용왕묘가 있는데, 갈 길이 바뻐 들르지 못하고, 바닷가의 작은 길을 따라 돌아오는데, 전족을 하고, 화려한 옷차림을 한 중국여인들이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번역문

산해관(山海關)에 도착하였다. 산해관 남쪽으로 망해정(望海亭)이 있었고, 북쪽에는 각산사(角山寺)가 있었는데 하루에 모두 보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내일은 유관(楡關)에서 유숙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곳까지의 거리는 백 리 길인데, 해는 짧고 길은 멀었으며 게다가 각산(角山)은 얼음과 눈 때문에 걸어 갈 수가 없어서 먼저 망해정을 보기로 계획을 수정하였다.
해가 뜨자 곧 길을 떠나려했지만 수레를 관리하는 왕문거(王文擧)가 길을 돌아가는 것을 싫어하여 선뜻 나서지를 않았다. 그래서 수레는 그만두고 말을 타고 가려고 했는데, 의원(醫員) 김정일(金鼎鎰)이 따라왔다. 남문으로 나가 10리를 가니 정자가 만리장성이 끝나는 맨 끝머리 지점에 있었다. 그것은 바다로 수백 보쯤 쑥 들어가 있는 모습이었으며 2층으로 되어서 성 위에 높이 솟아 있었다. 그리고 10여 계단의 층으로 된 다리가 있었다. 정자를 관리하는 사람이 문을 꽉 잠근 채 청심환(淸心丸)을 요구하였다. 그에게 청심환을 주지 않았더니 골을 내고 열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덕유(德裕)가 거짓말로 말하였다.
""돌아갈 때 다시 와서 꼭 30알이고 20알이고 많이 주도록 할 것이다.”
또 우리말을 섞어 가며 거짓 맹세를 하면서 성난 빛을 보였더니, 정자를 관리하는 사람은 얼굴을 활짝 웃어 보이며 말하였다.
“돌아올 때는 반드시 나에게 청심환을 많이 주셔야 하오?”
그러고는 곧바로 문을 열어 주었다. 중국 사람의 인품을 알 수 있었다.
누각에 오르니 눈이 미치는 끝까지가 구름과 바다뿐이었다. 거대한 물결이 솟아오르며 물 위에 떠내려가는 얼음덩이와 맞부딪쳐 공중으로 솟구치며 흔들리니 천지가 무너지는 듯하였다. 북쪽으로 각산을 바라보았다. 잇따라 솟아 있는 봉우리들과 성가퀴들이 만 리를 이어져 오다가 꼭 이 누각에 와서야 끝나고 있었다. 이 누각에 올라와서 눈시울이 적셔지지 않고 머리털이 위로 쭉 뻗지 않는다면 참으로 못난 사내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반평생을 돌아볼 때 우물 속에 앉아 그래도 잘난 체 눈을 크게 뜨고 가슴을 활짝 펴서 멋대로 천하일을 논하려 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스스로를 헤아리지 못한 것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때마침 바람이 몹시 차서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누각에서 내려와 누대 밑에 앉아 있었다. 그때에서야 평중(平仲)이 뒤쫓아 왔다. 언덕 위에는 황와비각(黃瓦碑閣)이 있었는데 지금 황제(皇帝)의 시(詩)와 글씨였다. 서쪽으로 몇 리를 가면 용왕묘(龍王廟)가 있는데 누각이 겹겹이었다. 갈 길이 바빠서 들리지 못하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20리를 달려 객줏집에서 밥을 사서 맑은 장국에 말아 먹었다.
망해정(望海亭)에서 여기까지는 바닷가의 작은 길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곳에 잘 오지 않았다. 마을 앞을 지나가니 마을 부녀자들이 정신없이 뛰어나와 구경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전족(纏足)을 하고 대부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한 중국 여자들이었다. 봉황참(鳳凰站)에 이르니 사행이 이미 점심을 마치고 떠나고 없었다. 다만 통역 정호신(丁好信)이 주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점심밥이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길을 달려 어두울 무렵이 되어서야 유관(楡關)에 도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