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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이야기 조각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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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행단이 가죽 채찍으로 얻어맞다
줄거리

봉성에서 감찰 기관인 찰원 앞에 이르렀을 때, 우리 사행단의 길잡이가 병사들에게 저지되어 더 나아갈 수 없었다. 왜 그러는 것인지 까닭을 묻자 우리들을 찰원으로 몰아들이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찰원은 땅이 질어서 거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의주 군관과 마부들이 병사들에게 하소연했지만 그들은 말을 듣지 않고 가죽 채찍으로 마구 내리쳤다. 역관들을 돌아보았더니 모두들 뒤로 물러나 있을 뿐 한 사람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한참 동안 다투고 나서야 간신히 해결되었다. 역졸들은 많이 얻어맞았고 그들 중에는 의복을 빼앗긴 자도 있었다.

번역문

봉황산으로 접어들자 산의 남쪽ㆍ북쪽ㆍ서쪽 삼면이 모두 한 눈에 들어왔다. 이 산의 크기는 우리나라 수락산(水落山)과 비슷했는데, 봉우리는 붓을 꽂아놓은 것처럼 생겼고 바위의 색깔은 푸르고 반들반들하였다. 동남쪽에 있는 4〜5개의 봉우리는 더욱 기이하고 아름다워서 우리나라의 산 중에서는 비길 것이 없었다. 이곳의 산들은 대부분 깎아지른 듯 가파르고 산기슭이 없어서 우리나라의 산과는 모양이 전혀 달랐다. 산의 남쪽에 옛 성터가 있는데, 돌로 만든 건축물이 아직도 완연히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이곳이 안시성(安市城)이라고 말하지만 잘못된 것이다. 어떤 이는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옛 성이라고 하는데, 아마 그 말이 가까울 것 같다. 『일통지(一統志)』에 ‘안시성은 개주(蓋州)에서 동북쪽 70리에 있다.’고 되어 있으니, 여기와는 거리가 먼 곳이다.
길에서 삯수레들이 앞뒤로 길을 메워 종종 통행이 막혔다. 비키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이곳의 인심이 극도로 나빠진 까닭은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을 많이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봉성(鳳城)에 도착하자, 주택가와 시가지가 상당히 번화하였다. 처음 보는 것도 많아서 눈이 현란하였다. 구경꾼들이 길에 늘어섰고 아이들이 고함을 지르면서 말 뒤를 따라왔다. 감찰 기관인 찰원(察院) 앞에 이르렀을 때, 우리 사행단의 길잡이가 병사들에게 저지되어 더 나아갈 수 없었다. 왜 그러는 것인지 까닭을 묻자 우리들을 찰원으로 몰아들이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찰원은 땅이 질어서 거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의주 군관과 마부들이 병사들에게 하소연했다. 하지만 그들은 말을 듣지 않고 가죽 채찍으로 마구 내리쳤다. 너무나 군색하고 치욕스러웠다. 역관들을 돌아보았더니 모두들 뒤로 물러나 있을 뿐 한 사람도 따라 나서는 이가 없었다. 정말 통탄스럽고 놀라운 일이었다. 한참 동안 다투고 나서야 간신히 해결되었다. 역졸들은 많이 얻어맞았고 그들 중에는 의복을 빼앗긴 자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