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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이야기 조각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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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금 도난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듣다
줄거리

고교보에서 묵었는데 갑군이 밤이 새도록 순찰을 돌며 우리나라 사람들을 도적과 다름없이 감시하고 방비했다. 숙소로 정한 집의 청지기 말로는 이곳 사람들은 조선 사람을 원수같이 생각해 가는 곳마다 문을 닫고 맞이하지 않으면서 조선사람들은 자신들이 신세진 숙소의 주인을 죽였다며 일행 중에 도적질 잘 하고 도망 잘 치는 자가 없다고 장담하겠느냐고 한다. 이 사정을 역관에게 물으니 4년전 고교보에서 사신 일행이 공금 인은 천냥을 잃어버렸다. 이 돈을 잃어버렸다고 해도 믿을 사람이 없고, 물어내자고 해도 감당이 안되니 지방관에게 그 사실을 알리자 금새 황제에게까지 알려져 황제의 분부로 잃어버린 돈을 찾았다. 하지만 이 지방은 관은으로 잃어버린 돈을 변상하고 지방관이 도적 막기에 힘쓰지 않아 길손에게 원통한 변을 당하게 했다는 이유로 파직을 시켰다. 또한 숙박집 주인과 그 가까운 이웃에 사는 용의자들을 잡아다 심문하면서 하도 심하게 닥달을 해서 그 중 4~5명이 죽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고교보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을 원수같이 보니 갑군이 저러는 것도 괴이한 일이 아니다.

번역문

이날 밤에 고교보(高橋堡)에 묵었다. 이곳은 지난번에 사신 일행이 은을 잃어버린 곳이다. 지방관은 이로 말미암아 파직을 당하였고, 근처 점포에 애매하게 죽은 사람이 있었으므로 갑군(甲軍)이 밤이 새도록 순찰을 돌면서 우리나라 사람을 감시하는 것이 마치 무슨 도적이나 다름없이 엄하게 방비하였다. 숙소로 정한 집 청지기의 말에 의하면, 이곳 사람들은 조선 사람을 원수같이 보아서 가는 곳마다 문을 닫고 맞이하지 않으면서 말하였다고 한다.
“조선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세진 숙소의 주인을 죽였다. 단 돈 천 냥이 어찌 4〜5명의 목숨과 같겠는가? 우리들 가운데도 불량한 이가 많지만 당신네들 일행 중에도 도적질 잘 하고 도망 잘 치는 자가 없다고 장담하겠는가?”
내가 이 사정을 역관에게 물으니 그가 말하였다.
“지난 1776년(영조 52)에 영조(英祖) 임금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한 사신 일행이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서 공금인 은 1천 냥을 잃어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사신들이 의논하되, ‘이는 나라의 돈이라 만일 쓴 곳이 없을 때에는 액수를 맞추어서 환납해야 하는 것이 국법이거늘, 이제 돈을 공연히 잃었으니 장차 돌아가 무슨 말로 아뢸 것인가? 잃어버렸다고 하여도 믿을 사람이 없고, 이를 물어내자고 해도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곧 지방관에게 그 사연을 알렸더니, 지방관은 중후소 참장(中後所叅將)에게 곧장 알렸고, 중후소에서는 금주위(錦州衛)에게, 금주에서는 산해관 수비(山海關守備)에게 알려서는 며칠 사이에 이 일이 예부(禮部)에 알려져서 황제의 분부가 금방 내렸습니다.
그리하여 이 지방에 관은(官銀)으로 잃어버린 돈을 변상하고 아울러서 이 지역 지방관이 항상 도적을 막기에 힘쓰지 아니하여 길손에게 원통한 변을 당하게 하였다는 이유로 파직까지 해버렸습니다. 게다가, 숙박집 주인과 그 가까운 이웃에 사는 용의자들을 잡아다가 심문하면서 하도 닦달을 심하게 해서 그 중 4〜5사람이나 죽었습니다. 사신 일행이 아직 심양에 도착하기 전에 황제의 분부가 벌써 내렸으니 그에 대한 일처리가 아주 신속하였습니다. 그 뒤로부터 고교보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을 원수같이 보니 따지고 보면 괴이한 일도 아닙니다.”
의주(義州)의 말몰이꾼들은 태반이 거의 불량한 자들이며, 오로지 북경에 드나드는 것으로 생계를 삼아서 해마다 북경 다니기를 저희들 뜰 앞처럼 여긴다. 그리고 의주부(義州府)에서 그들에게 주는 것은 사람마다 백지 60권에 지나지 않으므로, 100여 명 말몰이꾼들이 길가면서 도적질 하지 않으면 다녀올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압록강을 건넌 뒤로는 얼굴도 씻지 않고 모자도 쓰지 않아 머리털이 더부룩하여 먼지와 땀이 엉기고 비바람에 시달리어 그 남루한 모습이 귀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꼴이 마치 도깨비처럼 우습게 보인다.
이 무리 중에는 15살 된 아이가 있었는데 벌써 이 길을 3번이나 드나들었다고 한다. 처음 구련성(九連城)에 닿았을 때는 제법 말쑥하여 보였는데 여정의 절반도 못 가서 햇빛에 얼굴이 그슬리고 시꺼먼 먼지를 뒤집어써서 다만 두 눈만 빠꼼하니 희게 보일 뿐 홑바지는 낡아서 엉덩이가 다 드러날 정도였다. 이 아이가 이런 정도인데, 다른 것들은 더욱 말할 나위도 없다. 상황이 이러하니 그들은 전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도둑질하는 것을 보통으로 여기니 밤에 숙소에 들면 갖은 수를 다 내서 도적질을 한다. 그러므로 이를 막으려는 숙소 주인의 수단도 극도에 달하였다.
작년 동지(冬至) 사행 때에 의주 상인 하나가 은화를 가만히 가지고 오다가 말몰이꾼에게 맞아 죽었는데, 빈 말 2마리만 고삐를 놓아서 도로 압록강을 건너보냈으므로 말이 각기 그 집에 찾아 왔다고 한다. 그래서 찾아온 말을 증거로 삼아서 죄를 다스렸다고 한다. 이자들의 흉악함이 대체로 이와 같으니 이제 그 은을 잃어버린 사건을 이놈들이 한 짓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는 오히려 사소한 일이다. 만일 병자년의 호란 같은 일이 다시 있다 하면 용천(龍川)과 철산(鐵山)의 서쪽 땅은 금방 저들에게 붙을 터이니 더 이상 우리 땅이 아닐 것이다. 변방을 지키는 자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