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한국국학진흥원

이야기 조각보

사건
위로 이동 | 이전 페이지로 이동 | 다음 페이지로 이동
책문을 가다
줄거리

의주에서 강을 건널 때 5군데서 조사를 받은 후에야 삼강을 건너는데, 삼강이 얼어서 마치 육지와 같아 걸어서 건넜다. 책문 밖 100여리는 땅의 경계를 삼기위해 비워두어서 책문까지 가는 동안 구련성과 총수에서 노숙을 하였다. 노숙 시 상방은 4~5명이 거뜬히 앉을만한 몽고 행막을 사용하였고, 부방과 삼방은 개가죽으로 만든 행막을 쳤는데 2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다. 호위장군이나 역관은 베로 만든 막을 쳤고, 일반병사들은 하늘을 이불삼아 밖에 모여 앉아 모닥불을 피워놓고 휴식을 취했는데 그나마 불이 있어 병사들이 얼어죽지 않았다. 총수에서 출발하여 35리 정도를 가자 책문밖에 도착하였는데 책은 1길반이나 되는 나무를 세워 사람과 말이 드나들 수 없도록 하여, 이민족과 중국을 경계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책에는 문이 있어 원래 사행이 들어갈 때에는 봉황성을 지키는 장수가 마중을 나오게 되어 있으나, 심양의 호부상서가 왔다는 핑계로 나오지 않아 일행이 또 추운데서 잠을 잤다.

번역문

의주(義州)에서 강을 건널 때에 5군데에서 조사를 받았다. 오후 4시가 다 되어서야 강을 건넜는데, 삼강(三江)의 얼음과 눈이 마치 육지를 걸어가는 것 같았다. 10리쯤 가니 어두워졌기에 횃불을 들고 가야만 하였다. 구련성(九連城)에서 노숙하였다. 다음날 금석산(金石山)에서 점심을 먹고 또 총수(葱秀)에서 노숙하였다.
책문(柵門) 밖 백여 리는 그 땅을 비워 두어 두 나라의 경계를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그 산천과 숲들은 우리나라의 풍토와 같아서 사림(沙林)이 훤하게 아름다웠다. 이따금 산이 돌고 길이 굽어진 데에서는 으레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금석산은 솟아나 병풍처럼 둘러 있었고, 총수에는 돌벼랑이 있었다. 그리고 그 벼랑 아래로 냇물이 흐르는데, 흡사 평산(平山)의 총수와 같았으므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렇게 이름붙인 것이다.
노숙할 때에 상방(上房)으로는 몽고 행막(行幕)을 사용하였다. 길게 에워싸 마치 종을 엎어 놓은 것과도 같았다. 안은 4〜5명이 앉을 만하였으며 부방(副房)삼방(三房)은 개가죽으로 만든 장막을 쳤는데 겨우 2명이 들어갈 수 있었다. 어느 것이나 모두 땅을 파서 판자를 걸치고서 그 밑에 숯불을 피웠다.
호위장군이나 역관 이하는 베로 만든 막을 치고 서로의 몸을 베개 삼아 누워 잤다. 지위가 낮은 병사들은 무리지어 하늘을 이불삼아 밖에 모여 앉아 땔나무를 주위에 쌓아놓고 있었다. 그들은 밤새도록 모닥불을 피웠는데, 불꽃이 활활 타올라 마치 화성(火城)과도 같았다. 지위가 낮은 병사들이 얼어 죽는 것을 면한 것은 아마도 이런 불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팔을 불고 고함을 지르면서 새벽까지 경계가 삼엄하였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놓이지 않아 감히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총수에서 일찍 출발하여 35리를 가자 책문 밖에 도착하였다. 책(柵)은 1길 반이나 되는 나무를 세워 사람이나 말이 드나들 수 없게 하고서 가로 나무를 대고 얽어댄 것이다. 이는 이민족과 중국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칸막이를 한 것이다.
책문은 만리장성으로부터 하구에 이르기까지, 북으로는 타타르족과의 경계를 표시하고 동남쪽으로는 흑룡강(黑龍江)과 백두산(白頭山)을 경유하여 봉황성(鳳凰城)까지 바다에서 끝나는데, 길이가 또한 몇 만 리가 되는 것이다.
책에는 문이 있어 사행이 책 안으로 들어갈 때는 봉황성을 지키는 장수가 반드시 직접 나와 보게 되어 있다. 이날은 심양(瀋陽)의 호부 상서(戶部尙書)가 일이 있어 봉황성에 온다는 말을 들었다. 봉황성의 장수가 그것을 핑계로 나오지 않아 일행이 또 추운 데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