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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이야기 조각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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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의 뇌물 요구로 상황이 지연되다
줄거리

요동에 머무르며 이른 아침 관대인 유공윤과 차를 마셨다. 역관 표헌을 시켜 왜적 침투에 대한 위급한 사항을 전했다. 유공윤은 당장 타발을 해주기로 하고, 나도 물러 나왔는데, 조금 뒤에 유공윤이 진무 4인을 시켜 은자 4냥을 보내고, 자신이 구하는 물건을 별지에 적어 은자와 교환하여 바치도록 했는데, 거기엔 갈길이 아무리 급해도 이 물건의 수를 모두 바쳐야 갈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갈 수 없다고 적혀있었다.

번역문

맑음.
요동(遼東)에 머물렀다.
이른 아침에 내가 일행을 거느리고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에 가서 관대인(官大人) 유공윤(劉孔胤)을 뵙고 함께 차를 마셨다.
우리가 조정에 급히 알려야 할 일이 무엇인지 유공윤이 물었다. 그래서 표헌(表憲)을 시켜 말하게 했다.
“일전에 역관 우치평(禹治平)ㆍ김득일(金得鎰) 등을 특별히 보내서 올린 자문의 내용입니다. 적군 수장 토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는 매우 잔악해서 명나라와의 약속을 준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책사(冊使)가 돌아서자마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곧바로 조선에 왔는데, 병선(兵船) 60여 척에 1만여 명의 군사를 싣고 와서 기장(機張)ㆍ서생(西生) 등지에 나누어 웅거하고 있습니다. 또 풍무수(豐茂守)는 병선 60여 척을 이끌고 잇달아 대마도에 도착하였으며, 그 외에도 따로 출발한 적의 함선이 날마다 끊임없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나라의 형세가 매우 위급하고 급박합니다. 이 때문에 사신을 급파하여 위급함을 알리는 것입니다. 어르신께서는 저희를 가엾이 여기셔서 빨리 조정에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들은 수레를 가져오지 않았으므로, 타고 갈 말을 구해서 곧 출발해야겠습니다.”
그러자 유공윤이 말했다.
“본국에서는 왜적을 대비하는 일에 조금도 긴장을 늦출 수 없으니,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 방어해줄 것이다. 하지만 그대의 나라에서는 적이 출동하는 것을 충분히 탐지한 뒤에 본국에 알려도 늦지 않을 것이오.”
그래서 표헌이 대답했다.
“적군은 이미 우리나라 변방에 가득 포진해 있으면서 돌진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 형세가 몹시 사납습니다. 그러나 혹 사냥을 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함안(咸安)과 곤양(昆陽) 등지를 멋대로 횡행하고 있습니다. 혹은 진주(晉州)와 두치진(豆恥津) 등지에 진입하여 서쪽 길을 답사하고 있으니, 그들의 속내를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적군이 발동하여 조선 땅 깊숙이 들어온 뒤에 귀국에 알리게 된다면 명나라에서 아무리 구원해 주고 싶어도 분명 때가 늦을 것입니다.”
그러자 유공윤이 말했다.
“그대 말이 옳소. 당장 조정에 연락하겠소.”
나는 곧 물러 나왔다.
조금 뒤에 대인 유공윤이 진무(鎭撫) 4명을 시켜서 은(銀) 4냥을 보내면서, 자기가 구하는 물건을 별지에 적어 은 4냥과 교환하여 바치도록 했다. 그 별지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당신들의 갈 길이 아무리 급해도 반드시 이 물건을 수대로 모두 바쳐야 갈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갈 수 없소.”
그 속내를 살펴보건대, 우리가 갈 길이 급하다는 것을 빌미로 삼아 일부러 난처하게 만들 계략을 꾸미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목록에 적혀 있는 물건은 아주 많고 구하기가 번거로운 것이어서, 우리 일행의 여비를 몽땅 털어도 그 수를 채울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가 요구하는 것 중 겨우 1/3만 마련하고 목록을 만들었다.
그리고 진무들에게는 인사로 뇌물을 조금씩 주었고, 보내온 은자를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이장(李檣)에게 시켜서 진무와 함께 가서 물건을 바치고, 갈 길이 바빠서 가지고 온 물건이 부족한 사정을 곡진히 설명하게 하였다. 또 헌패(憲牌)를 조금도 지체할 수 없으니 속히 조정에 연락해줄 것을 소망한다는 뜻도 전하게 하였다.
그러자 진무들이 버럭 성을 내며 목록과 헌패를 땅에 팽개치면서 소리쳤다
“당신이 감히 헌패로 나를 위협하는 것이오? 우리가 구하는 물품은 하나도 바치지 마시오! 그리고 당신들은 날아가든지 달려가든지 마음대로 하시오!”
그리고는 말에 올라 채찍을 휘두르며 가 버렸다. 만류할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는 동안에 날이 어둑어둑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