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한국국학진흥원

이야기 조각보

사건
위로 이동 | 이전 페이지로 이동 | 다음 페이지로 이동
계주의 독락사를 보다
줄거리

계주에 들어갔다. 성 서쪽 안에 독락사가 있는데 견줄 바 없을 정도로 굉장했다. 가운데에는 장육불이 있었는데, 목 아래는 6길이고 허리는 몇 십 아름이나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성 밖을 나오니 길가에서 배를 팔고 있는 한인 3명이 있었다. 군관과 역관이 은전을 가지고 값을 흥정할 때였다. 갑자기 청나라 사람이 말을 몰고 달려왔는데, 한인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며 값도 묻지 않고 배 절반을 가져다주고 나머지는 두 소매에 넣고 달아났다. 한인이 청나라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번역문

맑음.
묘시(卯時: 오전 5~7시)에 출발하여 채정교(彩亭橋)를 지나 별산참(鱉山站)에서 점심을 먹었다. 30리를 가 어양호(漁陽湖)의 돌다리를 건너게 되었다. 계성(薊城)과 5리 떨어져 있는 까닭에 다리이름을 오리(五里)라고 했다. 계주(薊州)에 들어갔는데, 이곳은 당나라 시대의 어양(漁陽)이다. 토지가 비옥하고 인물이 성대하여 근방 고을 중에서는 최고였다.
성 서쪽의 안에는 독락사(獨樂寺)가 있는데 견줄 바가 없을 정도로 굉장하였다. 가운데에는 장육불(丈六佛)이 있었는데, 목 아래는 6길이고 허리는 몇 십 아름이나 되었다. 우러러보니 눈이 시릴 정도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성 밖을 나오니 길가에서 배를 팔고 있는 한인 3명이 있었다. 군관과 역관이 은전을 가지고 값을 흥정할 때였다. 갑자기 청나라 사람이 말을 몰고 달려왔는데, 한인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며 값도 묻지 않고 배 절반을 가져다주고 나머지는 두 소매에 넣고 달아났다. 한인이 청나라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이날은 110리를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