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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이야기 조각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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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흥부에 도착해서 심문받다
줄거리

소흥부 성에 들어가 심문을 받았다. 탁자를 하나 놓고 서쪽을 보고 서게 한 다음 성명, 주소, 관직, 표류된 까닭, 약탈한 일이 없었던 정상, 무기를 가진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등에 대해 물었다. 공술서에 차이가 있으면 죄를 받게 되니 지금 한 말을 한 글자도 빼놓지 말고 다시 쓰라고 하여 다시 썼다. 왜적이라고 하면 체포해서 죽이려고 했는데, 만약 조선인이라면 당신 나라 역대의 연혁과 수도, 산천, 인물, 풍속, 제사, 상제, 인구, 군사제도, 토지 조세, 복식 제도를 자세히 써보라고 하였다. 여러 역사 기록과 비교한 후에 그 말이 옳은지 아닌지 판단하겠다고 하여 줄줄이 말을 했다.

번역문

배를 저어서 감수(鑑水)로 올라갔다. 감수는 경호(鏡湖)에서 한 갈래 나뉘어서 흐르는 것인데 소흥부(紹興府) 성안을 돌아 나간다. 해 뜰 때 소흥부에 도착하였다. 성 남쪽에서부터 감수를 거슬러 올라 동쪽으로 돌아 북쪽으로 가서 창안포(昌安鋪)를 지나면 성에 들어간다. 성에는 수구(水口)와 마주 보는 홍문이 있었는데, 4겹으로 되었고 모두 쇠 빗장을 설치했다. 큰 다리 5개와 경괴문(經魁門)ㆍ연계문(聯桂門)ㆍ우성관(祐聖觀)ㆍ회수칙비(會水則碑) 등을 지나서 10여 리쯤 가니 관청이 있었다. 적용(翟勇)은 우리들을 이끌어서 언덕 기슭에 내렸는데 그 저자거리는 번화하였고 인구도 영파부보다 3배는 많았다.
총독비왜서도지휘첨사(總督備倭署都指揮僉事) 황종(黃宗), 순시해도부사(巡視海道副使) 오문원(吳文元), 포정사령수우참의(布政司令守右參議) 진담(陳潭) 3명이 징청당(澂淸堂) 북벽(北壁)에 죽 늘어앉았는데, 병기와 갑옷, 채찍과 몽둥이가 그 앞에 놓여 있었다. 탁자 하나를 놓고 나를 이끌어서는 서쪽을 보고 서게 한 다음 성명ㆍ주소ㆍ관직, 그리고 표류된 까닭, 약탈한 일이 없었던 상황, 무기를 가진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등에 대해 물었다. 나는 파총관에게 대답하던 대로 답하였고 동시에 하산(下山)에서 도적을 만난 일, 선암(仙巖)에서 몽둥이를 맞고 짐과 말안장을 빼앗긴 사실을 추가 했다. 그랬더니 세 사람이 파총관이 보고한 문서를 보여주면서 말하였다.
“어째서 공술한 말이 앞뒤도 안 맞고 진술의 분량도 다른가?”
내가 대답하였다.
“파총관이 처음 물을 적엔 표류해서 정박하게 된 상황만을 대답했었지만 오늘 포정삼사(布政三司)가 다시 물을 적에는, 도적을 만났던 등의 일을 상세히 다 들어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랬더니 3명이 천천히 나에게 말하였다.
“공술서에 차이가 있으면 당신은 죄를 받게 된다. 그러니 지금 한 말을 한 글자도 빼놓지 말고 다시 쓰도록 하라.”
그래서 나는 그대로 해 주었다. 세 사람이 또 나에게 말하였다.
“앞으로 당신이 항주(杭州)에 도착하면 진수(鎭守)ㆍ태감(太監)ㆍ수의(綉衣)ㆍ삼사대인(三司大人)께서 전후의 사실을 물을 것이고, 북경에 도착하면 병부(兵部)와 예부(禮部)에서 다시 당신의 사정을 물을 것이니, 그때에도 지금 말 한대로 답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절대로 안 된다.”
또 물었다.
“처음에는 당신들을 왜적이라고 여겨서 체포한 후 모두 죽이려 하였는데, 당신이 만약 조선인이라면 당신 나라 역대의 연혁과 수도ㆍ산천ㆍ인물ㆍ풍속ㆍ제사ㆍ상제(喪制)ㆍ인구ㆍ군사제도ㆍ토지 조세ㆍ복식 제도를 자세히 써보라. 여러 역사 기록과 비교한 후에 당신 말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를 판단하겠다.”
내가 말하였다.
“연혁과 도읍은 처음에 단군께서 요임금과 같은 시대에 즉위하여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는데 수도는 평양이었고, 여러 세대에 걸쳐 1,000여 년이나 지속되었습니다. 그 후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으므로, 역시 평양에 도읍하고 8조문으로 백성을 가르쳤으니, 지금 나라 사람들이 예의 바른 풍속을 이루게 된 것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에 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하여 조선에 들어와서는 기자의 후손인 기준(箕準)을 내쫓았고, 결국 기준은 마한으로 달아나서 그곳에 도읍을 정했습니다. 그 중간에 혹은 구한(九韓)이 되기도 하고, 혹은 이부(二府)가 되기도 하고, 혹은 사군(四郡)이 되기도 하고, 혹은 삼한(三韓)이 되기도 했는데, 연대가 멀고 오래되었으므로 다 기술할 수가 없습니다.
전한(前漢) 선제(宣帝) 때가 되어서는 박 씨가 처음으로 신라를 세웠고, 고 씨는 고구려를, 부여 씨는 백제를 세워서 옛 조선의 땅을 삼분하였습니다. 신라는 동남쪽의 경주에 수도를 두었고, 고구려를 서북 지역에 자리 잡아서 요동과 평양에 수도를 두었다가 또 여러 번 그 나라를 옮겼는데 자세한 지명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백제는 중부의 서남 지역에 자리 잡아서는 직산(稷山)에 도읍했다가 뒤에 광주(廣州)ㆍ한양ㆍ공주ㆍ부여 등지로 옮겼습니다.
그 후 당나라 고종 때 신라 문무왕이 당군과 함께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켜 삼국을 통합하여 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후에 견훤은 전주를 근거지로 삼아서 나라를 세웠고, 궁예는 철원을 근거지로 삼아서 나라를 세웠으나 고려의 왕건이 공적이 높고 덕망이 성대했기 때문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추대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궁예는 스스로 도망했고, 견훤은 스스로 항복했으며, 신라의 경순왕은 나라의 재산과 군현의 장부를 들고 와서 항복하였으니 재차 삼국이 통합되었습니다. 수도는 개성이었습니다. 대대로 500여 년이나 지속되었다가 지금은 혁명하여 우리 조선이 되었고 한양에 도읍하였습니다. 그 후로 지금까지 100여 년이 지났습니다.
산천으로는 장백산(張白山)이 동북방에 있는데 백두산(白頭山)이라고도 합니다. 너비는 1,000여 리나 뻗쳤고, 높이는 200여 리나 되는데, 그 산꼭대기에는 연못이 있어 둘레가 80여 리나 됩니다. 동쪽으로 흘러서는 두만강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서는 압록강이 되고, 동북으로 흘러서는 속평강(速平江)이 되고, 서북으로 흘러서는 송화강이 되었는데, 송화강 하류는 곧 혼동강(混同江)입니다. 묘향산은 북쪽에 있고, 금강산은 동쪽에 있는데 12,000여 봉우리가 있으며, 지리산은 남쪽에 있고 구월산은 서쪽에 있는데, 이상 네 산은 매우 높고 험하며 신기한 흔적이 많습니다. 삼각산은 곧 한양을 지키는 주산입니다.
하천으로는 대동강ㆍ청천강ㆍ임진강ㆍ한강ㆍ낙동강ㆍ웅진ㆍ두치진(豆恥津)ㆍ영산강 등이 큰 강입니다.
인물은 신라의 김유신ㆍ김양(金陽)ㆍ최치원ㆍ설총, 백제의 계백, 고구려의 을지문덕, 고려의 최충ㆍ강감찬ㆍ조충ㆍ김취려ㆍ우탁ㆍ정몽주 등이 유명하며 우리 조선의 경우는 다 셀 수도 없습니다.
풍속은 예의를 숭상하며 오륜(五倫)에 밝고 유학을 존중하여, 해마다 봄가을에는 양로연(養老宴)ㆍ향사례(鄕射禮)ㆍ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고 있습니다. 제사로는 사직(社稷)ㆍ종묘(宗廟)ㆍ석전(釋奠)과 여러 산천에 지내는 제사가 있습니다. 형법에 관한 제도는 『대명률』에 따르고 있으며, 상제(喪制)는 『주자가례』에 따르며 의복의 제도는 중국의 제도를 따르고 있습니다. 나머지 인구ㆍ군사제도ㆍ토지 조세는 내가 유신(儒臣)이기 때문에 그 자세한 것을 알지 못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