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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이야기 조각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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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상황 빈전에서 곡반에 참여하다
줄거리

경운문 밖에서 1,000여명 남짓 되는 사람들과 어울려 곡을 하였는데, 경운문 안에서 곡소리가 나면 밖에서도 따라서 곡을 하였다. 사람들은 경운문 밖에 사정이라는 황제가 활을 쏘는 정자에 장막을 쳐서 각 부의 이름을 써놓았는데 낮에는 거기서 기다리다가 하루에 3번 곡을 하는 반열에 참여하였다. 황제의 명으로 경운문 안으로 들어가서 살펴보니 신년하례식 때와 같은 의장이 서있었고, 태상황이 사냥할 때 탔음직한 백마 10여필이 서있었다. 문안에서 곡하는 사람은 삼품이상으로 수천명도 넘어보였고, 전안에서 곡을 하면 따라서 곡을 하는 등 절차는 문 밖과 동일하였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는 태국의 사신과 회자국의 사신도 있었다.

번역문

경운문(景運門) 밖에 나아갔다. 이 문은 건청궁(乾淸宮) 왼편 월랑(月廊)에 있는 문이었다. 1월 1일에 들어갔던 융종문(隆宗門)과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즉시 곡하는 반열에 참여하였는데, 여기서 곡에 참여한 자가 대략 1,000여 명 정도 되었다. 모두 위에는 양가죽 옷을 입었고, 가죽옷 안에는 폭이 큰 삼베로 옆을 튼 두루마기를 입었다. 폭이 큰 삼베로 소공(小功)의 띠만 하게 띠를 접어 띠었는데, 그 안은 푸르고 검은 옷을 평상시 같이 입었다. 검은 마래기를 썼는데, 왕공(王公)과 대신(大臣)부터 말단 관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같았다. 또 검은 옷을 입은 자들도 많았는데, 이 사람들은 여러 관리를 따르는 종자(從者)라고 하였다.
경운문 안에서 곡소리가 나면 문밖에 늘어선 반열도 따라서 곡을 하였다. 그들은 먼저 한 번 꿇고 세 번 머리를 땅에 대는 일궤삼고두(一跪三叩頭)의 예를 행한 후에 다시 일어섰다가 세 번 꿇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대는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예를 행하고 이어서 곡하였다. 그 절차가 이러하였다. 경운문 밖 동남쪽으로 50보쯤 되는 곳에 1좌(座) 단청(丹靑)한 집이 있었는데 누런 기와를 얹었으며, 섬돌은 한 길 정도 되었다. 여기가 사정(射亭)이라고 하는 곳인데 황제가 활을 쏘는 정자라고 한다. 정자 오른편에 각 부에서 장막(帳幕)을 쳐서는 쭉 이었다. 장막마다 이름을 써 놓았다. 낮이면 다들 거기 모여 앉아 기다리다가 하루에 3번 곡하는 반열에 참여하였다.
사시 말(巳時末: 오전 9〜11시)에 통관이 황제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경운문 안으로 우리를 인도하였다. 따라 들어가 1월 1일에 신년을 하례하던 곳에 이르러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좌우를 보니 의식의 위엄과 격식을 위해서 서있는 의장(儀仗)들은 1월 1일에 신년하례식을 행하였던 곳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건청문 밖 왼편에는 명정(銘旌)을 세웠다. 대나무로 만든 깃대의 길이는 다섯 길은 되어 보였고, 굵기는 두 움큼보다 굵었다. 아래 위를 다 누렇게 칠하였고, 깃대에는 붉은 비단에 금으로 색칠한 것을 달았으며, 한복판에는 검은 비단을 달았는데, 길이가 2자는 되었고 넓이는 5치 정도 되었다. 글자가 쓰여 있었지만 보지 못했다.
또 문 오른편에는 백마 10여 필이 서 있었는데, 다 궁중의 관리들이 쓰는 안장을 올렸고 그 위에는 누런 보자기를 덮었다. 또 개를 끌고 매를 받든 자가 의장 옆에 섰으니, 이는 모두 태상황제가 평소에 사냥할 때에 따르던 것이 아닌가 싶다. 시간이 되어서 붉은 옷 입은 한 사람이 누런 양산(陽傘)을 가지고 와서 정문 서쪽에 세웠다. 그랬더니 좌우 의장이 일시에 정제(整齊)하더니, 곡성(哭聲)이 전(殿) 내에서 나오기 시작하였다. 삼문(三門)을 활짝 여니, 꿇으면서 머리를 조아리고 곡하는 절차는 경운문 밖에 있을 때와 같았다.
문안 반열에 참여한 사람들은 다 삼품(三品) 이상이라고 하는데, 숫자가 수천 명은 되어 보였다. 곡을 하면 소리가 궐내에 진동하였다. 모두 한 소리로 곡하였는데 철없는 아이의 소리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문안에 있는 여러 사람들을 보니 다 왕공과 대신, 그리고 가까운 종실이었다. 태학사 유용(劉墉)과 예부 상서 기균(紀昀)이 건청문(乾淸門) 밖 동서반의 제일 앞에 서 있었다.
전 안은 우리가 선 반열에서 멀었다. 멀리서만 바라보았더니 전 위에서 한복판으로, 큰 문이 건청문 정문과 함께 서로 마주 보고 있었지만 깊숙하여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전(奠)이 끝나자 일시에 장내를 비우고 문도 닫혔으며 붉은 옷 입은 8〜9명의 사람들이 금빛 탁자를 두 사람씩 마주 들고 누런 보자기를 덮어 나왔다. 전을 물린 것인가 싶었고, 왕공 대신과 모든 사람들이 다 사방으로 흩어져 갔다.
태국 사신은 우리 아래 섰는데, 머리 위에 독각 금관(獨角金冠)을 검은 삼승(三升)으로 쌌으며, 흰 두루마기는 저들과 똑같이 입었다. 회자국(回子國) 사신은 태국 사신 아래 섰는데, 곡할 때에 더러 자주 눈물을 닦는 자가 있었다. 중국에 품직(品職)이 있어 자못 높다고 하였는데, 검은 낯과 구레나룻이 밉지 아니하여도 흉악한 오랑캐일 뿐이다. 그들 앞을 지나가면 비린내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