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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시놉시스

회자국 사신을 흉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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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에 대한 내용

위구르 사신 일행이 하루 세 번 곡하는 반열에 참여할 때마다 크게 부르짖고 통곡하며 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처음에는 정말 슬퍼서 그러는가 싶었는데, 여러 번 살펴보니 번번이 침을 찍어서 눈가에 발라 눈물이 나는 것처럼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중 젊은 사람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웃음을 참는 행동도 하고 있었다. 자기들도 자신들의 행동이 간사하다는 것을 알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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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관

산해관

산해관(山海關)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관문이다. 1381년 명나라를 세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대장군 서달(徐達)이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명령을 받아 세운 대규모 방어시설이다. 관의 북쪽에는 연산산맥의 줄기인 각산(角山)있고, 남쪽에는 발해(渤海)가 있다. 산해관의 이름은 각산과 발해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산해관은 하나의 관문이 아니라 둘레가 5km인 성곽 전체를 말한다. 특히 동문은 이중으로 문을 만들고, 그 밖에는 나성을 둘러 방어의 기능을 높였다. 외문 바깥쪽에 ‘山海關(산해관)’이란 편액을 달았고, 내문 바깥쪽에는 ‘天下第一關(천하제일관)’이란 편액이 붙어있다. 이 산해관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중화와 오랑캐를 가르는 상징적 기준이었다. 산해관의 안쪽을 관내(關內)라고 하였고, 밖은 관외(關外)라 했으며, 청나라 북경에 들어설 때에도 입관(入關)이라고 하였다.
산해관은 천하제일의 관문답게 통관 절차가 까다로웠다. 사신 일행은 산해관에 도착하기 하루 전에 역관을 먼저 보내 사신이 도착했음을 알렸고, 관문 앞에 이르러 사람과 말의 수를 적은 단자를 들여보냈다. 관문이 열리면 관의 책임자의 점검을 받으며, 세 사신을 선두로 하여 문반과 무반이 대오를 이루어 차례로 들어섰다. 관내로 들어선 사신들은 발해 가에 쌓은 방어기지 영해성(寧海城)에 올라 발해를 구경했다. 영해성은 발해로 20m 들어가서 끝이 나는데, 여기를 노룡두(老龍頭)라 부른다. 만리장성을 한 마리 용에 비유하여, 그 머리라 하여 붙인 이름이다.

동천주당

동천주당(東天主堂)에 관한 기록은 홍대용의 『연기(燕記)』에 소상하다. 동천주당은 몽고관(蒙古館)에서 북옥하교(北玉河橋)를 지나 자금성(紫禁城)을 따라 가다가 보이는 기이한 기와 지붕을 인 서양식 집이다. 지금의 왕부정대가(王府井大街) 74호에 있다. 북경 4대 천주교당 가운데 하나인 동천주당은 명말 2명의 선교사가 세웠으며, 청조가 북경에 들어올 때 훼손됐다가 순치(順治) 12년(1655)에 이 땅을 하사했다. 이때 남당과 같이 건립됐지만 가경(嘉慶) 12년(1807년)에 화재로 폐허가 됐는데, 1884년에 로마식으로 다시 건립됐다. 의화단의 난 때 다시 불탔으나, 1904년 배상 형식으로 프랑스와 아일랜드가 공동으로 중건했다.
천주당을 방문한 연행사들은 원근법을 이용한 서양 그림의 사실적인 화법에 감탄하곤 한다. 홍대용은 북쪽 벽에 그려진 천주(天主)의 화상(畵像)이 모발이 무성하여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하여, 원근법을 사용한 서양 그림의 입체감에 탄복하였다.
동천주당 서쪽에는 자명종루(自鳴鐘樓)가 있고, 누각 아래에는 해시계[日晷石] 한 쌍이 있다. 서쪽으로 난 문밖으로 두어 길 되는 대(臺)가 있었는데, 이를 관성대(觀星臺)라 하였다. 대 위에는 집 셋을 세워 놓았고, 가운데 집에 혼의(渾儀)ㆍ망원경 등 여러 가지 의기들을 저장하여 두었다.
대 아래 넓이가 수십 묘(畝) 되는 뜰에는 벽돌을 쌓아 길이가 1장쯤 되는 기둥을 만들어 두었는데, 위에는 열십자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이런 것이 무려 수백 개가 뜰에 널려 있었으니, 대개 봄여름에는 위로 포도 덩굴이 올라가도록 횃대를 놓아 둔 것이다. 기둥 옆에 군데군데 무덤처럼 흙을 모아 둔 것은 포도를 저장하는 곳이다.
뜰 동쪽에 집이 두어 칸 서 있고 가운데에는 우물이 있었다. 우물 위에 두레박틀을 만들어 두었고, 옆에는 치목(齒木)을 가로질러서 톱니바퀴가 맷돌처럼 고르게 돌아가게 하였다. 벽에는 버드나무 물통이 수십 개나 매달려 있었다. 또한 봄여름에 물을 길어 포도에 대는데, 기계 바퀴가 한 번 돌면 수십 개의 두레박이 차례차례로 물을 끌어올리기 때문에 사람이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물은 도랑에 고루 퍼져 뜰에 가득 차게 된다. 홍대용은 천주당에서 포도를 힘들여 가꾸는 것은 술을 빚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인물 서유문(徐有聞)

1762(영조35) 스스로 행동을 나서서 하지는 않지만 남의 말을 경청할 줄 알고, 그 말 속에 재미를 찾아낼 줄 아는 사람이다. 실제로 본 것처럼 남의 말을 듣고 상상하는 것을 매우 잘한다. 위험을 무릅쓰고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실천하는 사람을 마음속으로 부러워하고 닮고 싶어 하나 실제로는 마음이 약하고, 행동력이 부족하다. 하지만 유머러스한 풍자가 뛰어나 해학적인 재미를 주는 발견을 곧잘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