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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이야기 조각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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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을 팔다
줄거리

서경순이 상방의 병방 군관인 주부 한응태에게 내 차림새가 어떠한가 묻자 그가 집사 양반이 우리들과 똑같아졌다고 말했다. 서경순이 지금 곧 압록강을 건너게 되었으니, 양반과 나이는 모두 강가 버들가지에 걸어 두었다가 돌아올 때 다시 찾기로 하고, 이제부터 양반으로 대접하지 말라 하였다. 한 주부가 그 말을 듣고 버들가지 위에 그냥 걸어 두면 가져가는 자가 있을지 모르니, 남에게 팔아서 노자에 보태는 것만 못할 것이라 하였다. 강을 건너기 전에 팔아야 할 터이니 자신이 중개하겠다며 나섰다. 한 주부가 양반 값이 얼마냐고 물어오자 서경순은 값이 비싸지만 시세에 맞추어 결정하라고 하였다. 서경순이 급제하면 감사까지 될 것인데 감사의 녹봉은 3만 냥보다 덜하지는 않을 것이나 그것은 미래의 일이므로 그 반으로 잡자고 하였다. 하지만 서경순은 나이 60에 가까우니 현직으로 논하자 하였다. 그렇다면 1만 냥짜리 고을살이는 수월할 것이니 그 반절로 하자고 하였다. 서경순은 그럴까 하다가 5천냥은 분수를 모르는 말이라고 하니 한 주부가 그렇게 되면 팔리지 않을 것이니 제 주머니에 있는 조선통보 3푼을 줄 터이니 탁주 한 잔을 사고 문서를 만들자고 하였다. 서경순은 내일의 1만냥이 눈 앞의 한 잔 술만 못하나 몇 백년 전하여 오던 칭호를 하루아침에 딴 사람에 던져 주는 것이 섭섭하니 도로 물릴 수 있는 문서로 만들자고 하자 듣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번역문

내가 상방(上房)의 병방 군관(兵房軍官)인 주부(主簿) 한응태(韓膺泰)를 돌아보고 말하였다.
“내 차림새가 어떠한가?”
그가 대답하였다.
“집사(執事)의 양반 모습이 이제는 우리들의 번란한 차림새와 똑같아졌습니다.”
내가 말하였다.
“이제 장차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게 되었으니, 내 양반과 나이는 모두 강가 버들나무 가지 위에 걸어 두었다가 돌아올 때에 다시 찾기로 하겠네. 이제부터는 자네들과 서로 ‘자네’니 ‘내’니 하면서 지낼 것이니, 다시는 나를 양반으로 대접하지 말게.”
한응태가 대답하였다.
“버들나무 가지 위에 그냥 걸어 두면 혹여 가져가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니, 다른 사람에게 팔아서 노자에 보태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강을 건너면 1푼어치도 못 될 것이니 강을 건너기 전에 팔아야 할 터인데, 제가 사이에서 중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말하였다.
“좋을 대로 하게”
한응태가 말하였다.
“집사의 양반 값을 얼마로 해야 되겠습니까?”
내가 말하였다.
“값이 비싸지만 자네가 기꺼이 중개하려고 한다면 시의(時宜)에 맞게 결정하면 될 것이네”
한응태가 말하였다.
“만일 집사께서 과거에 급제라도 하시면 방백(方伯)까지도 되실 것입니다. 방백의 봉급은 비록 영동(嶺東)과 같이 제일 척박한 곳이라도 단연코 3만 냥 이하로 떨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그렇게 되지 않은 상태이고, 지금은 그때가 언제가 될지 모르는 일이니, 그 값의 반을 취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내가 말하였다.
“내가 나이 거의 60에 가까워 세속의 미련이 이미 남아 있지 않고, 『장자(莊子)』를 쓴 장주(莊周)의 꿈도 이미 끊어졌으니 어찌 현직으로 그것을 논하지 않는가?”
한응태가 말하였다.
“그렇다면야 집사의 뜻을 제가 알겠습니다. 1만 냥짜리 태수(太守)자리는 문제될 것이 없으니, 이것의 반으로 값을 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내가 말하였다.
“그럴까? 아니지 아니야. 1만 냥짜리 태수(太守)를 내가 어찌 감히 바라겠는가? 우리 같이 머리가 하얀 사람들은 초사(初仕)자리 1자리라도 얻을라치면 마치 매우 단 엿처럼 단물 빨기에 정신이 없지. 거기에서 한 10년쯤 묵으면서 비바람을 맞아 가며 나랏일로 분주해 보았자 끝내는 상처뿐인 가난한 고을이나 차지하게 될 것이네.
게다가 6월과 12월의 고과(考課)에서 ‘마땅히 결과에 힘써야 한다.[宜勉剛果]’거나 ‘단속함이 너무 부족하다[太欠束濕]’는 따위의 말로 하고(下考)에 들게 되면, 처음에 금전적 해택을 얻어서 살림이나 잘하려던 계획이 도리어 잘못되어 가정을 파탄나게 하고 몸에는 치욕만 돌아가게 할 뿐이네. 그래서 돌아올 때 전대를 살펴보면 분명 반 푼도 없을 것이네. 5천 냥 운운하는 것은 너무 분수를 모르는 말일세.”
한응태가 말하였다.
“진정 주부의 말씀과 같다면, 양반자리는 팔리지 않을 것입니다. 제 주머니에 현재 조선통보 3푼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강을 건넌 후에는 쓸데없는 것이 되겠지만, 『노자(老子)』의 말에 ‘없을 때를 당해야 그것들이 쓸 데가 있다.[當其無 有器之用]’고 하였습니다. 제가 이 돈을 탁주 1잔과 맞바꾸고, 그런 다음 문서를 만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내가 말하였다.
“내일의 1만 냥 재물이 참으로 눈앞의 1잔의 술만도 못하네 그려. 그러나 삼한(三韓) 이후 몇 백 년 전래하던 칭호를 하루아침에 딴 사람에게 던져 주는 것이 내 마음에 섭섭하네 그려. 그러니 모름지기 도로 물릴 수 있는 것으로 문서를 만드세.”
한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크게 웃고는 문밖으로 나가니 큰 강이 가로놓여 있었다.